- 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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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수상한 삼형제’ 드라마가 인기를 받고 있다. 이 드라마에는 삼형제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건강, 현찰, 이상이라는 삼형제와 청난, 우미, 어영이라는 세 며느리가 나온다. 시어머니 전과자(이효춘 분)와 세 며느리를 보면서 결혼 이후 여자의 삶을 엿보게 된다.
드라마 속에서 보여 지는 여자의 삶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의 축소판 같다. 고된 시집살이를 겪은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들만 귀한 줄 알며 며느리들을 자신이 가진 조건과 기대에 따라 함부로 대한다. 큰 아들 건강이에게 시집 온 큰 며느리 청난이가 80평 아파트를 가진 처녀라고 알 때와 이후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났을 때와 큰 며느리를 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결국 청난은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게 된다. 둘째 며느리 우미 역시 온갖 집안일과 두 아들 키우는데 모든 시간을 쓴다. 자신의 어머니가 서울에 살지만 맘 놓고 연락 한 번 못한다. 더군다나 남편 현찰과 동창생 연희와의 관계에 의심과 질투가 더해지면서 몹시 힘든 상황을 맏고 있다. 막내 며느리 어영 또한 어머니 없이 아버지를 모시고 동생을 키워 와서 그런지 몰라도 남편 이상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다. 매사를 전투하듯이 밀어붙이는 모습을 본다.
물론 드라마 속 모습이지만 현실의 우리 모습과 큰 차이가 없음을 본다. 한 집안을 구성하고 있는 네 여인들의 삶 모습 속에서 행복한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왜 네 여인들에게서 행복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걸까? 비교적 독립적인 생활을 하던 처녀시절이 더 행복할까?
결혼이란 관계에 헌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헌신은 자신이 선택한 희생을 기초로 한다. 삶이 살아지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에 의한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희생은 결과에 상관없이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강요된 희생은 언젠가 반드시 댓가를 요구한다. 시어머니의 표독스런 모습 속에서, 둘째 며느리 우미의 폭발 속에서 강요된 비자발적 희생은 삶에 얼룩을 드리운다.
드라마 속 여인들의 삶이 어떻게 더욱 아름답게 변해갈 수 있을까? 더욱 아름답게 변해간다는 것이 욕심일까? 진실한 희망일까? 여인들의 삶 속에 내재하는 불행은 가부장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관계에서 나온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는 소외된 약자로 남는다. 여성이 소외된 곳에선 싸움과 전쟁이 끝이질 않는다.
게리 해멀은 20세기를 휩쓸었던 경영원칙과 프로세스들이 더 이상 설 곳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과 개인의 과제는 혁신의 생활화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중심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된 여성들의 곡소리가 담긴 판도라 상자는 이미 열려 졌다. ‘수상한 삼형제’가 혼란스런 이유는 바로 억압된 여성들의 곡소리가 곳곳에서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인들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기 위해선 가부장사회가 제공하는 여성 정체성과 환상이라는 거울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허구성을 꿰뚫어보며 세계와 자신의 틈새를 인식하고 객체에서 주체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새로운 여성 탄생의 시작이다.
중년 여인들의 자기발견과 자기실현에 대한 열풍이 서서히 불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자녀와 남편만을 위한 맹목적 희생을 거부한다. 자신의 꿈과 재능을 찾고 이를 통해 봉사 · 자기 계발 활동 등에 적극적이며 의미 있는 삶을 살려는 여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요즘 40대 주부들은 재교육, 봉사, 취미생활 모두를 의미 있게 여기며 일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수상한 삼형제’의 앞날이 밝고 행복할지의 여부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아버지 김순경네 가족의 미래는 네 여인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