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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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 물길 스스로다.
- 고 이윤기 선생님을 기리며...
까칠하게 깎은 반백의 머리, 그 아래로 드러난 하얀 이빨, 검게 그을린 얼굴이, 얼마나 많은 시간 그가 지중해와 유럽의 태양아래 있었는지 가늠케 한다. 아직은 아까운 63세의 나이, 그가 펜을 놓고야 말았다.
그의 부고를 받던 그 시간, 나는 ‘제9회 강의날대회’가 진행되던 안동의 하회마을 만송정 솔 숲에 있었다. 새벽하늘 위로 커다란 달무리를 보고 있었다. 내일은 슬픈 비가 내리겠다 싶었는데, 메시지가 먼저 알고 울었다. 심장마비, 준비하던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 그렇지만 그는 행복했으리라. 길 위에서 죽었으니. 평생 신들의 이야기를 찾아, 먼 이국땅을 떠돌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세상에 숨겨진 갖가지 암호같은 코드들을 찾아 그는 우리에서 또 다른 세상 보여주는 일을 평생 하였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의 이야기를 좇아, 그는 우리의 삶을 물어왔다.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가 그랬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그리고 다시 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손길을 거쳐 가지 않은 신들이 없었다. 그의 눈길은 백화점의 장식품 하나에 마저도 숨겨진 의미를 꿰뚫어 내었고, 그가 본 세상은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도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온 세계였다.
나는 그의 글을 통해 ‘움베르토 에코’를 만나게 되었고, 기호학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해 중세 수도원의 비밀을 파해쳐 가던 베네딕트 수도사인 윌리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긴장의 순간에, 그는 나를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손에 땀을 쥔 채로, 등불을 비쳐들고 서 있게 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풀려가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그가 옮긴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었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쥐어 주었고, 에게해 푸른 바다 위를 떠돌던 우리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사랑하게 하였다. 그가 그 많은 책들을 옮기고, 적지 않은 글을 쓰면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다 간 그가 말한다.
‘물길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물 스스로’라고.
나는 이렇게 듣는다.
‘삶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대 스스로’라고.
흐르는 강물을 사랑했던 그는 이제 스틱스 강을 건너, 이미 망각의 강이라는 레테를 건넜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무뚝뚝하다는 카론에게 쥐어 줄 노자 돈 하나 보태지 못하였다. 아니 아직은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를 잊고 싶지 않아서 일지 모른다. 그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이고, 그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병상을 찾아들던 하데스의 양해를 구해서라도 하고 싶어라 했던 일, 혹여 신들과 함께 춤을 추는 그의 신화는 아니었을까.
펜을 놓은 글쟁이. 더는 쓸 수 없는 목숨.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유품들 속에서 나는 그의 유서를 배껴 적는다. “신들처럼 살라고, 아니 신들조차 질투 나는 삶을 쓰라”고.
닮고 싶었던 그의 삶과 새롭게 시작할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