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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델피에서처럼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 교정에도 이와같은 원형극장이 존재하였고, 그 공간은 운명처럼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오프닝 현장.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거머쥔 진행자의 리드에 따라 처음 보는 옆사람의 손을 잡고, 한마음이 된 학우들은 그곳에서 양희은의 ‘아침 이슬’을 목청껏 노래 불렀다. 긴밤 지새우고로 시작되는 노래 가사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는 나의 가슴을 타고, 모두의 뜻을 담아 담장을 넘고 공간을 넘었다. 그리고 그 시간속에서의 하나됨은 자유의 노래, 해방의 노래의 의미를 담아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때부터 나의 마음속엔 이 원형극장이 커다랗게 자리하게 되었다.
나는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젊디젊은 청춘의 목표가 보이지 않아 방황을 할적에도
어떻게하면 참답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라는 돈안되는 고민을 할적에도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자괴감을 느낄적에도
대낮부터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새우깡 안주를 하나 깨물으며 개똥철학을 논할적에도,
신체검사 결과 대한민국 남자들이 다가는 군대를 가지않을적에도
시국사건에 연루된 친구가 손에 포승줄을 묶인채 법정에선 현장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못했을적에도
나는 그대로인데 철마다 꽃들이 계절의 변화를 노래할적에도,
왠지 이유없이 목청껏 김광석 형님의 노래를 부르고 싶을적에도
흘러가는 마음을 추스르지못해 문득 감정이 동하여 구내 이발소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박박 밀고 나와 싸늘한 찬바람을 맞을적에도
이 원형극장은 나와 함께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항상 나의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맨 뒷자리였다.
그자리는 가장 조망이 좋았다.
앞쪽에 사람들의 행위를, 감정을, 언어를 바라보고 느낄수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도, 내리는 빗방울도, 간밤 술을 먹은 중생 오물의 흔적을 탐하는 참새들도, 무대의 주인공들도 모두 나의 공간에 초대된 손님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나만의 생(生)의 지휘를 하였다.
꿈을 꾸었다.
연출을 하였다.
생각을 하였다.
술을 마셨다.
하염없는 시간을 낚고 놓쳤다.
델피의 원형극장에서 당시의 나의 모습을, 나의 존재의 흔적을 다시 바라볼수 있었다.
그랬지.
그랬었구나.
왜그랬었지?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미래의 나나 모두가 나의 모습이다. 각기 떨어진 분리의 모습이 아닌 하나의 모습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감정들을 공유하였던 이곳.
여기에서 나는 나의 정신적 향수(鄕愁)를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