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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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면 오래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
이 철 민 : 수탉 꿈벗부족
나는 이제 출사표를 던진다. ‘출정의 북’을 울려라.
1. 제목 : 백일(百日)로 익숙한 것에 백기(白旗)를 들게 하라
2. 목표
처음 단군 프로젝트 신청시 나는 이놈의 무게를 가벼이 보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의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는 지금, 내 앞에 놓인 100일은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 그것은 ‘익숙한 놈’의 저항이다. 이미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처음 나는 새벽(04시30분 ~ 06시30분) 글쓰기와 저녁시간 줄넘기 천 번을 목표했었다.
전열을 가다듬으며 이제 나의 붉은 피는 온도를 높여가고 있다.
이제 레벨을 높여 나는 100일 동안,
첫째 20권의 책 읽기와,
둘째 10개의 꼭지 글로 ‘익숙한 놈’에게 백기(白旗)를 들게 하리라.
3. 중간목표(20고개)
20고개 |
확인 일 |
목 록 |
비 고 |
1 |
~ 5.28 |
익숙한 것과의 결별 |
5/28 |
2 |
~ 6.2 |
생각붙잡기 |
6/2 |
3 |
~ 6.7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
6/5 |
4 |
~ 6.12 |
칼 융 |
6/13 |
5 |
~ 6.17 |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1 |
6/17 |
6 |
~ 6.22 |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2 |
6/23 |
7 |
~ 6.27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6/26 |
8 |
~ 7.2 |
삼국유사 |
7/1 |
9 |
~ 7.7 |
책문 |
7/6 |
10 |
~ 7.12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7/11 |
11 |
~ 7.17 |
도연명의 사상과 문학 |
7/16 |
12 |
~ 7.22 |
꼴찌도 행복한 교실 |
7/20 |
13 |
~ 7.27 |
신화의 힘 |
7/29 |
14 |
~ 8.1 |
관계의 재구성 |
8/4 |
15 |
~ 8.6 |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
8/7 |
16 |
~ 8.11 |
창의성의 즐거움 |
8/13 |
17 |
~ 8.16 |
제국의 미래 |
8/20 |
18 |
~ 8.21 |
심리 유형의 역동과 발달 |
8/21 |
19 |
~ 8.26 |
지식경영법 |
8/27 |
20 |
~ 8.31 |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 |
8/31. OK. |
4. 예상되는 난관과 극복방안
① 주변의 모든 것(회식, 친구, 잠, 인터넷 그리고 곰 같은 마눌님과 토끼 같은 아이들...)이 나의 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최대의 적은 이미 내 속의 익숙한 그 놈이다.
������ 돈키호테 스타일로 단순하게...
② 4회차에는 기말고사가 들어 있고, 15회차에는 여름휴가 일정이 계획되어 있다.
������ 현지에서 지혜롭게...
5. 목표달성 시 일어날 긍정적인 변화
첫째 익숙한 놈에의 승전(勝戰)
둘째 ‘꿈지기의 겨드랑이’(첫책) 초고 완성
셋째 삶의 터닝포인트
6.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줄 보상
: 홀로 도보여행을 떠난다.
스스로에게 즐거운 레이스가 되기를 ...

그렇다 이 대목은 노자의 무위경영의 일부를 김구를 통해서 듣고 있는듯하다. 규칙은 법으로 금할 때 그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눈에는 보이기 때문에 알량하게도 마음의 위로를 얻을수는 있을 지 모른다. 또 그것을 지켜내려는 강제가 있을때는 형식에 매이는 것도 목격할 수 잇을 것이다. 반대로 마음으로 습관을 세우게 된다면 그것은 누가 보던 그렇지 않던 스스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형식에 대하여 최소의 것은 필요할 수는 있겠으나 형식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학문의 순서는 이와 같다. 자신의 행실을 바로잡고 / 자신의 지식을 수양하고 / 그로 학문의 진리를 알고자 노력하고 / 터득하고 / 그 진리를 실천하는 /
또한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인재는 학문적 평가를 인정받은 개인이 아니라 먼저 효 / 경 / 충 / 신 / 입 / 치 / 의 순서에 적합한 자를 골라내는 작업이 인재등용의 커리큘럼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첫번째로 꼽고 있는 치(다스림)는 처음이 아니라 맨 나중이다. 이것은 다스림에 앞서 효, 경, 충, 신, 입의 수양이 된자가 다스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스림을 따로 수양하지 않아도 선행된 5가지를 수양하라는 뜻이다. 선인의 깊은 가르침이다.

이 이야기는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맑은 물에는 갓을 쓴 사람들이 모여 들고, 흐린 물에는 사람들이 모이되 와서 발을 드러내 닦는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들이 물가에서 무엇을 하는가는 물이 어떤가에 좌우된다는 내용이다. 물은 자신을 뜻한다. 내가 어떤 물인가 이것이 인재를 불러들일지, 소인배들을 주변에 모으게 될지 결정하는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작게는 개인의 주변을 생각할 수 있지만, 강희맹이 세종에게 이 이야기를 할때는 왕의 주변에 인재가 모이게 되는 것과 간신과 사리사욕을 탐하는 자들이 모이게 되는 것은 왕의 처신에 달려 있다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이것은 결국 치세에 해당됨을 알리는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세우는 것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환경, 인적 네트워크와 밀접함을 맹자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기쁘다.

막 장원급제를 통과했으니. 이들 머릿속엔 온갖 정치철학과, 역사서에서 모범답안으로 제시하는 답들이 꽉차있을테고, 또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보지 못했으니 의협심에 넘쳐 정답을 곧이곧대로 대답했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시험장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을 능글능글한 기성 정치인들이...피식피식 웃으며 '너도 한 3년만 다녀봐라.어찌 변하나.."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을 테지요. ㅋㅋㅋㅋㅋ.
흔히들 넌 너무 이론적이야..라고 말하면서 '교과서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을 비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론적이어서 현실에 맞지 않다고 섣불리 말하는 사람 중에..교과서에서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꾸준히 노력해 본 사람은 참 드뭅니다. 서점에 아무리 훌륭한 책들이 넘쳐나고 그 속에 행복한 삶, 성공한 삶에 대한 비결이 넘쳐나는 데도 정작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적은 것은 앎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교과서를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기 때문이겠지요.
현실의 쓴맛을 아직 보지 못한 치기어린 과거급제자들의 발직하고 무모한 대담. 책문 속으로 저도 빠져보고 싶어지네요. ㅋㅋ

존재. 이것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단군의 후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있으나 없는 것. 내가 여기서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이 나의 존재가 인정되는 것이다. 열 고개를 넘으면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시간의 밀도를 높여갈 것이다. 단군의 후예 모두 화이팅.
사람이 될 때 까지. 내가 될 때 까지 ...

니체도 소로우도 자신의 고립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루었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육신의 고립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립을 통해 고독을 배웠고 희망을 배웠을 것이다. 그 고독이 자신을 세울 수 있도록 에너지가 되었음이다. 이것은 자발적 고립과 타에 의한 고립의 차이를 말해준다. 그 결과는 사뭇 다르다. 그 다름은 희망이라는 것의 존재와 부존재이리라. 자발적 고립에 담긴 희망은 그 시간을 창조적 시간으로 빛나게 하지만 수동적 고립, 어찌보면 억압. 이것은 희망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 날아간 희망은 고립의 시간동안 고독을 알 수 없도록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 조차도 자신에게 짐으로 남을뿐이다.

세상에 기준이 무엇인가? 시와 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대답으로 시비의 기준은 자신에게 있고 자신이 믿는 것에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자신이 시비의 기준이 되거나, 자신이 믿는 것이 기준이 된다고 보는 것이 장자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며 고착화 시킬 일이 아니라는 유연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또 장자는 고정관념 즉 내안에서 고착화된 시비의 기준을 상심(常心), 성심(成心)이라고 하여 이 상심을 버려야 분쟁을 막을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양행(兩行)의 주장이 나오는데 시와 비를 버리는 마음을 '양행의 도'라고 하였다 .
요약하면 시비의 기준은 나에게 있으며, 그것은 고정관념화 되어서는 안된다.
고착화된 상심을 버려야 다툼이 없고, 이처럼 시비를 버리는 마음을 '양행의 도'라 하였다.
참 쉽지요 잉~~

모르겠구나! 지금 이후에, 또 다시 이와 같을 수 있을지.
술 마시는 가운데 느긋한 마음 풀어놓고, 저 천년의 근심을 잊는다.
우선 오늘의 즐거움을 다할 것이니, 내일 일은 추구할 바 아니로다."
(도연명의 사상과 문학중에서).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이 57세의 나이에 멀리 층성산을 바라보며 벗들과 술한잔 합니다.
삶에서 '지금'이란 언제나 지금 뿐입니다. 두번의 지금은 없지요. 그런 도연명이 후일 벗들이 또 다시 술병들고 찾아와 술을 마실지언정 그건 알수 없으니, 지금을 만끽하고 지금 이 술에 성실하게 취하여(?) 마시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그리하여 술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니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음을 즐거워하는 시 입니다.
도연명은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모두 받아들이고 이것을 조화롭게 실천합니다. 벼슬을 버리고 가난하지만 청빈하게 자연에 맡겨 살되 부드러우면서도 때론 강렬한 삶을 삽니다.
벼슬도 새장속의 삶에 불과하다며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 개는 깊은 골목에서 짖고, 닭은 뽕나무 꼭대기에서 운다.
집 뜰에는 진세의 번잡함이 없고, 빈방에는 넉넉한 한가로움이 있다.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혀 있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올 수 있었네" 라고 말합니다.
요즘 장안이 권력으로 시끄럽습니다. 도연명은 권력에 기대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합니다.
오늘 생각해봅니다. 나는 무엇을 잡으려 하고 있는가? 부끄럽습니다. 청빈의 삶을 살고자 하나 살 수 있을까를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벗이 술병들고 찾아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지금'을 잡고자 합니다.

이것을 주역에서는 " '書不盡言 言不盡意' 라 하여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그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고 하여 말의 한계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뜻(의미)의 포용성을 설명하고 있다.
뜻(의미)의 방대한 포용성을 성경에서 고린도전서의 저자 바울 사도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13장7절)" 고 하여 말의 한계를 채우는 것은 사랑이라 설명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사랑이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되거나 부족함 그 자체로 오류를 갖게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불완전, 실수, 교만 이런 것들은 부족함에서 오는 것들인데 사랑은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불완전한 것을 안정되게 한다. 잘못을 용서하게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기업의 조직문화는 어떤가? 부장의 취미에 맞추어 귀신같이 골프를 배우고, 어제 먹던 양주가 오늘부터 막걸리로 바뀌는 것을 보면 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리더의 스타일은 매우 중요하게 조직내에 스며든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리더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그러다보니 리더의 감각은 무의식에도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원하지 않았더라도 짊어져야 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순탄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불행하게도 사건으로 발생하였을 경우 작위적이든 작위하지 않았든 일정 귀속된다. 만약 작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 역시 결국 무책임하고 신뢰받지 못하는 리더로 뒷소문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조직의 문화는 빠르게 리더를 쫓는다고 했다. 그러나 리더가 몰고 오는 것이 어디 외적인 스타일뿐이겠는가. 리더가 신(信)을 추구하면 조직내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다. 예(禮)를 따른다면 작위하지 않고 명령하지 않아도 자유롭고 업무의 흐름에 막힘이 없다. 의(義)를 찾으면 외부로부터 긍정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은 리더가 바뀌어도 조직안에 남는다. 리더가 질서를 알면 부하직원들 역시 탁구라켓을 준비하고 축구화를 사듯 그러한 것들을 따라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리더가 결국 조직을 머무르게도 나아가게도 하는 결과가 된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사회는 결정해야 한다. 어떠한 것을 가치관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평범한 중,하위권 아이들을 중심으로 할건지, 아니면 소수의 우수한 아이에게 맞춘 교육을 할건지. 사회는 결정해야 한다. 중소기업 위주의 기술력과 경쟁력있는 정책을 맞출것인지, 대기업에게 힘을 실어주어 횡포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사회는 결정해야 한다. 영세한 동네상권을 보호할 것인지, 대형 할인점의 자본 경쟁을 그대로 둘 것인지. 사회는 결정해야 한다. 분명 잘못된 것이고 죄인데 특정한 법이 없다고 한 발 뒤에서 보고만 있을 것인지, 예를들면 불법 사행성 오락이 사회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어도 그러하여 사회의 풍속에 반하고 있어도 공공의 안전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러한 것들을 결정하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이다. 사회는 그렇다 치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지식만 강조된 교육, 인간이 빠진 교육은 사회를 해치고 타인의 불편을 죄로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을 생각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과 사고의 필요성을 생각할 수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성, 가치관, 윤리, 배려, 질서유지... 이러한 것들은 내가 살고 있고 내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또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스크럼을 깨치지 않고 돌아가게 하는 공동체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등생(한 반의 우등생을 제외한 층), 외고(나머지 일반고), 고액 사교육(못하거나 평범한 부모를 둔 아이들), 명문대(서울 이외의 대학) , 대기업(중소기업), 고액연봉(평범한 생활자).
슬픈것은 우리사회가 소수 지향적이고 소수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추앙받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고칠 것인가? 어떻게 개선 할 것인가? 의 문제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여기서 하나라도 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 소수를 위해서 희생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회구조. 대한민국은 가치를 재조정해야 한다. 과거 가난했던 시절에 빠른 성장과 생존을 위해서 '빨리빨리 문화와 나만 아니면 돼' 의 사고방식이 사회를 멍들게 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가 인문학적 프레임을 배제하고 숫자의 각도에서만 바라본다면 굴레를 벗어나오기란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공동체라는 그 공동체적 가치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사회는 공동체 즉 다수의 사람들이 건재해야 하는 곳이다.
사회는 다수를 위한 프레임이 작동되어야 한다. 소수는 어찌되었든 그 안에서도 잘 해 갈 것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거나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공동체적 가치관에 대한 바른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우수한 인재 한 명이 일만 명을 먹여 살린다. 어느 사장님의 이야기다. 그리고 정책을 세우는 여러분들이 이 말을 인용한다. 간단히 듣기에 달콤하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여 일정 부분엔 나 역시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정책은 우수하고 능력있는 소수의 무리들을 위한 정책에 더 힘이 실린다. 어떻든지 소수의 무리에 포함되어야 하고 엘리트가 아니면 식당에서 조차도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지금이다. 모두는 자신이 특별하게 인식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모두가 특별하다는 것이 가능한가? 모두가 특별하다면 그것은 특별함이 가치하락 하여 오히려 평범해지는 것이 아닌가. 더 어려운 일이지만 10인 10색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월급생활자 보다는 고액연봉자를, 결재와 납품구조로 대기업의 횡포속에서도 성장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중소기업과 그 위에서 군림하는 대기업, 일반대학에서 꿈을 키우는 대학생들과 사회적 관심을 받으며 자부심으로 팽팽해진 명문대학생, 평범하게 야자하는 일반 학생과 부모덕에 고액과외 받으며 특수고에 다니는 학생, 소수 몇 명의 암기위주의 성적우수자와 나머지 아이들... 이 모두가 우리 사회는 이미 소수만을 지향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다수로 구성된 대중보다는 그 위에 한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상한 기준. 사회란 소수가 이끄는 것이 아님에도 그것에 의문을 갖지 못하는 사회. 소수에 끼지 못하는 대중은 어쩌란 것인가? 소수를 위한 조연과 엑스트라역에 만족해야 하는가? 한 분야에서 인재 한 사람이 일만 명의 대중을 먹여 살린다고 하여 일만명 위에 군림하는 것은 또 당연한 것인가?
우리는 합리화한다. 학교에서 배웠던 고차방정식과 영어의 유려한 문장이 실생활에서 써 먹을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적 사고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 배웠다. 오히려 그것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쉽게 평가하고 그들을 줄 세워 초장에 우등생과 실패자로 구분하기 위한 그들의 프레임인 것을.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정보와 기술의 산물을 경험하면서도 아직도 우리는 사고하는 방식조차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학교는 세상을 가르쳐야 한다. 어른들의 생존방식과 삶의 기술들을 현실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직업적 기술과 높은 인격의 필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성과 기술을 동일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가 대접받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ISTJ. [Si Te F Ne]


소통은 교차하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교차하여 한 호흡을 하는 것이지요. 만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은 이미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왔으니 나 역시 그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그 어울림이 소통입니다. 세상은 항상 내 곁에서 묵묵합니다. 다음 단계는 내가 세상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것입니다.
길섶의 풀에게 말을 걸고 떠가는 구름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은 그것에게 생명을 넣어주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를 통해서 세상과 나는 하나가 됩니다. 그 순간이 캠벨이 말한 ‘그것’이 ‘그대’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존재가 되고 의미가 됩니다.
생명을 넣어주는 과정. 그것이 존재에 대한 인식과 인정의 행위입니다. 너를 너로 승낙하는 것이지요. 이 인식의 과정이 쌓여 갈수록 삶은 풍요로워 집니다. 모두는 친구가 되고 친구를 통하여 나의 존재는 더욱 넓어지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으로 관계 하락이 될 때 우리는 갈등과 이별을 경험합니다. 서로는 분리를 경험하게 되고 분리는 결국 ‘있으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상태. 나와 분리된 아무 상관없는 그것일 뿐입니다.
길섶의 풀은 그저 잡풀로, 하늘의 구름도 잠시 있다 사라질 것으로 보일 밖에요.
그나 묻습니다. 잡풀도 구름도 나와 진짜로 아무 상관이 없을까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글)

아래에 매일 글쓰기 했던 일부를 옮겨본다.
새가 풀숲에서 한가로이 먹이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자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시나요. 사실 그것은 잔인하게 생명을 죽이는 장면임에도...
삶은 첫째 다른 생명을 죽임으로써 내가 살게되는 아주 신성한 순환의 과정입니다. 그러니 삶이란 얼마나 신성한 것입니까? 여기에 신성이 담겨있습니다.
둘째 나를 죽임으로써 새로운 내가 살게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 생명의 지금이라는 것을 죽이는 연속적 과정. 나의 지금을 죽이는 것. 이것은 달리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의 삶의 에너지와, 전체 삶 중 일부분인 ‘지금’이라는 순간을 계속적으로 죽여 떠나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을 죽이고 새 것을 맞는 연속적 과정이 ‘살아있음’입니다. 살아있음은 죽음으로 가는 길(path)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마르가(marga) 입니다.

휴가가 기다려지는 것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때 제한적이나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쉼을 통해 내 영혼을 치료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우리는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내가 살기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억누르고 포기한 채 살고 있는가?
창조성은 형식위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형식과 비합리적인 시간' 위에서 발현된다. '말씀이 있어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빛과 어둠이 갈라진다.' 이 얼마나 무형식적이고 비합리적인가? 피카소가 그리던 비둘기. 그가 숫자를 수학적 기호로 보지 않고 상징화 하고 형상화하는 과정. 이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가?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샤인 볼트의 자유분방함을 보면 무형식이 주는 자유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뛰면서조차 얼굴에 비장함보다 웃음기가 보인다. 물론 포장된 자기관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고싶다.
창조성은 무형식과 비합리성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새벽시간을 하루 일과 정도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칙센트의 플로우의 개념에서 처럼 무형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시간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것은 과학적 시간의 개념이 아니다. 마음속 영적 영역의 수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느낌만으로 시간을 내 삶속으로 끌고와야 한다. 그것이 오래가는 방법이다.

신뢰는 삶을 풍성하게 하고 사랑 또한 신뢰에서 싹이 자라난다. 고로 진심을 주고 그것을 수용해주기 바란다. 이 둘의 상호교환의 전제가 신뢰의 기본 바탕이며 사랑의 뿌리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실수가 많은 존재이다. 만일 인간이 완전해 질 수 있다면 상호 신뢰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완전함만으로 오히려 상대를 강제하고 자신에게 굴복시키려 할 것이다. 자신의 완전함을 도구로 상대를 구속하고 평가하려 할 것이다. 완전함. 이것의 단점은 자기 기준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프레임만 확고해진다. 상대의 불완전함, 그래서 그것이 지닌 무한 가능성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이제 열네번째 고개를 넘었다. 한 고개를 5일씩 스무고개를 넘으면 단군의 후예의 여정을 마친다. 이제 여섯고개가 남았고 30일이 남았다. 변화라면 새벽 기상은 내 콘트롤 타워속으로 어느정도 잡아두었다. 두번째는 필살기를 연마하는 것이다. 온전히 그 두시간을 내 삶속으로 끌어오는 것인데 이도 단군이를 시작하기 전 보다는 질적으로 나아짐을 느낀다. 물론 갈 길은 아직 멀다. 일만시간이 되려면 양적으로도 멀고 질적으로도 강도가 더 높아져야 한다. 남은 여섯고개동안 최선을 다하리라. 이 단군 프로젝트가 나를 온전히 나의 세상으로 데려다 줄 때까지...

"절실함은 그 보다 높은 책임을 갖는다.
즉, 절박함은 그 만큼 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하고 그 의지는 책임의 얼굴을 갖고 있다."

프로이드는 사람의 성을 리비도로 설명하였다. 상대의 성. 이것은 나와 다름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나와 다르다 하여 대립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끌어안는 확장된 통합의 힘이다. 공격성 또한 자기와 자기 아닌 이미지를 구별하여 분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중욕동 이론’이라 한다. 예를들면 자전거가 끊임없이 좌·우로 움직이는 미세한 흔들림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정신분석가 제이콥슨은 프로이드의 리비도와 공격성에 비추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정리하면 리비도와 공격성은 상호간 통합과 분리의 균형감 있는 힘의 작용으로 안정된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한다.

'신뢰'는 삶을 풍성하게 하고 사랑 또한 신뢰에서 싹이 자라난다. 그러므로 서로는 진심을 주고 그것을 수용해주기 바란다. 이 둘의 상호교환의 전제가 신뢰의 기본 바탕이며 사랑의 뿌리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실수가 많은 존재이다. 만일 인간이 완전해 질 수 있다면 상호 신뢰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있을수도 없지만 자신의 완전함은 오히려 상대를 강제하고 자신에게 굴복시키려 할 것이다. 자신의 완전함을 도구로 상대를 구속하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완전함. 이것의 단점은 자기 기준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프레임만 확고해진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또 그것이 지닌 무한 가능성에 대하여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페르소나는 방어용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가면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여 속이거나 숨으려 할 때 가면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페르소나의 모습은 다변적이어서 무한하다. 언제 어디서든 상황에 맞는 적당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 사람들은 평소에 그러한 모습을 익숙하게 습관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가면은 스스로 진화하는 자동 업그레이드 기능을 갖고 있어 스스로 자신을 보완한다.
가면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을까? 자신을 숨기고 선택한 가면은 내가 원하는 모습인가? 만약 그렇다면 가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 관리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일관되게 선택되는 가면이 있다면 그것은 어찌보면 내가 원하는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가면을 벗고 원래의 자기 얼굴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으면서 선택하는 가면은 본래의 내가 누구인지 조차 잊게 만든다. 본 모습이 없이 선택되는 가면은 허상뿐이다. 가면을 쓰고 거울 앞에 서 듯이 외적인 환경의 조절을 통하여 가면도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나의 얼굴로 바꾸어 가야 한다.

저 멀리 산
산 뒤에 산. 첩첩산.
그 산 위에 파아란 하늘
하늘 위에 별 같은 꿈.
현실과 꿈의 경계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별
꿈에서만 보이는 별
그것은 꿈 (습작 시)
: 어릴 적 내가 세던 별은 항상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도심의 하늘은 오염되어 보이지 않았고, 또 키가 커버린 나는 바빠서 볼 수가 없었다. 산 속에 가니 그때의 별이 그 자리를 아직도 지키고 있었다. 가린 것들을 치우니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새롭지도 변하지도 않은 어릴적 보았던 그 별이었다. 장소를 바꾸어 보이는 별은 마음을 바꾸어도 보인다.


열여섯번째 고개를 넘는 날. 100일. 스무고개를 시작하고 어느새 여기까지 달려왔다. 아니 달렸다기 보다는 그저 느리게 천천히 기어왔다. 아직 걸음마도 아니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행동의 크기를 제한하고.
처음 단군이때는 일어나기도 힘든날의 계속이었고 반쯤부터는 일어나기에 편해지더군. 그리고 어슴프레한 빛이 내게로 들어왔다. 그리고 매일쓰는 쪽글이 알차지기 시작한 듯하다. 이렇게 시간이 채워져야 한다.
100일의 100. 이것이 나를 나로 태어나게 하고, 나를 나로 살게 할 것이다. 일만시간이라면 하루 두시간으로 100일의 50이어도 되겠지... 무엇으로 나를 채우고 무엇으로 나를 세울것인가? 아직도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다. 위축되기도 하고 때론 의기양양해지기도 하는 감정의 변화가 더 힘들때가 있다. 실력이 채워지지 않음이다.
필살기. 내 손에 실력을 붙여야 한다. 가자. 느리게 천천히 과거의 어느날 사부님처럼 나는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기어갈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말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사회에 윤리와 도덕, 양심이 생겨나게 된 핵심요소이다. 말을 함으로서 생각을 전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동지의식이 생겨나기도 하고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들은 또 그들끼리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다양성의 총합이 문명이 되었다. 그것이 기록되고 누적되어 문명은 또 발전하였다. 사람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상대의 외모만으로 그를 평가하고 추측해야 한다. 그러니 우선 경계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 결과가 얼마나 오류투성이겠는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부드러운지 거친지, 공격적인지 수용적인지, 말뿐인지 행동이 함께 하는지, 입을 열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정확히는 말을 하는 순간 내 추측의 실수의 수치는 조금 낮아진다. 고로 사람이 말을 하기 전에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 짐승이 공격적이고 거친 것은 그들은 서로 외모만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추측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이지 알 수가 없다. 설령 아군이어도 무엇으로 소통하겠는가. 그리고 곧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을 방어하거나 우세하기 위해서 상대를 공격한다. 이것은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소통이 이와 같다. 말은 있으나 서로 소통되지 않으면 그 말이 무슨 역할을 하겠는가.

사람의 능력에 대하여 창의성의 대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수치화 지능과 합리화 지능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청소년에 적용하면 수치화 지능은 배우고 기술을 습득하는 등의 우선적 1차 지능이다. 이것은 청소년기에 발달시켜야 한다. 두 번째는 합리화 지능이다. 이것은 1차 지능을 확장하고 패턴화 하고 나아가 자신의 방법을 찾거나 이론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능이다. 성인초기에 발달시켜야 한다.
예를들어 피아노의 건반을 치고 악보를 보는 기본적인 기술은 누구나 교과서처럼 배워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을 수련하며 어느 순간 자신의 스타일을 찾고 기존의 악보를 바꾸어 보는 등의 변화된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창조적 삶은 이 두 가지 지능이 끊임없이 계발되어야 할뿐더러 어느 시점에서 이 두 지능은 역할의 상화교환 작용이 필요하다. 이것은 감각(sensing)과 직관(intuition), 사고(thinking)와 감정(feeling)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