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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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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3일 09시 19분 등록
아버지 됨에 대하여

올 여름경의 일이다. 처가에 일이 있어 간적이 있었다. 처가에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두 분만 계시고 두 처남은 분가하여 살고 있다. 자주 들리지는 못하지만 맏사위라 눈치껏 자주 찾아뵈려고는 하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두 아이의 외할아버지인 장인어른께서는 두 아이를 무척 예뻐하신다. 사실 결혼 초기 두 아이가 생겼을 때 우린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애들 양육에 시간을 낼 수 없어 처가에 몇 년씩 맡기곤 했다. 큰애가 2년 정도, 작은 애를 3년 정도 처가에 맡기고 나서야 조금의 생활여유가 생겨 데리고 왔다. 갓난애기때부터 아프면 알리지도 않고 병원에 다녀오신적도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두 분의 우리 애들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똥오줌을 다 받아내셨으니 그 사랑이야 오죽하랴. 문제는 애들이다. 그렇게도 과잉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외가에만 가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종종 있다. 몇 번을 타일러도 잘 되지 않더니 기어코 나랑 사단이 벌어졌다. 아침을 먹으려고 밥상을 차렸는데 작은 애가 밥투정을 하다가 수저를 상위에 내던진 것이다. 그 순간 처가고, 어른이 계시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애를 잡고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어어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며칠 전 형님네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형제라고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같이 모인 것이 얼마만인가 싶어 즐겁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TV도 보고 과일도 먹으면서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큰 애가 초등학교 6학년인데 동갑내기 사촌형제가 있다. 두 녀석은 컴퓨터 게임에 열중이라 남들이 뭐 하는지는 관심도 없고 오직 컴퓨터 게임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작은애(초등학교 3학년 여자애)가 게임을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약 30분가량을 그러고 있는 것을 보고는 큰 애한테 좀 하게 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 녀석을 들은 체 만 체 자기들 게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얘기를 하였으나 묵묵부답, 그 순간 나는 큰애의 목덜미 옷을 끄잡고 나갔다. 집에 가자. 너 같은 애는 여기서 게임을 할 자격이 없어. 큰 애는 순식간에 게임을 박탈당하고는 어리둥절하다가 삐쳐서 혼자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당황한 큰집식구들을 놓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 나나 큰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큰애를 붙잡고 말했다. 자기만 아는 애는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하려면 나가서 혼자 살아라. 하고 싶은 데로 살고 싶으면 니 혼자 살아라. 아빠는 그런 애는 필요 없다. 큰애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최근에 겪은 일이었다. 어제 저녁에 꿈 벗 프로그램에서 만난 유관웅 선생님과 저녁을 같이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애들과 부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내가 겪은 일들을 말하면서 과연 아빠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여쭤보았다. 유선생님께서는 집 안에서와 바깥에서의 행동양태가 다른 나의 모습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자식에 대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집 안에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러나 바깥에서는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태도는 애들에게 나중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하긴 내가 봐도 문제가 많다고 느끼고 있으니 틀린 말씀은 아닐 게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이렇게 애들을 키우다간 세상 못살겠다는 생각도 든다.

2년 전 겨울에 ‘두란노 아버지학교’를 5주간 다녔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아는 분이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수료했다. 아버지로서 잘 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례들과 참가한 아버지들의 반성과 참회를 들으면서 스스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애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가정이 이렇게도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가한 아버지들의 모습에서 내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 학교에서 말하는 스킨십, 편지쓰기 등의 내용은 우리 집은 평상시 하는 것들이라서 내게는 새로운 스킬훈련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런게 아버지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아버지로서 잘해야 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난 시골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는 잘 몰랐지만 내 아버지는 엄격한 유림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시골집에 손님이 오거나 아버지 친구 분들이 오면 놀다가도 꼭 사랑채에 내려가서 큰 절을 하고 무릎 꿇고 어른들의 말씀을 듣다 그만 나가 놀아라 하는 말씀이 계신 후에야 물러나곤 한 기억이 생생하다. 한두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절 기억에서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유교적 생활에 익숙한 아버지의 기억에 익숙하다. 지금도 제사 때나 시제를 지낼 때면 유일하게 망간과 두루마기를 입으시는 분이 아버지이다. 축문도 아버지 외에는 할 줄 아는 사람이 인근에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의 성격을 많이 닮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내가 봐도 고지식하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모습에 익숙해지려 한 것 같다. 요즘 서예를 배우는데 은근히 재미를 붙이는 걸 보면 어릴 적 붓글씨를 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아 즐겁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 단순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사람됨을 가르치고 자기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부모와 그 속에서 밝고 구김살 없이 마음껏 자랄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성장체로서 자식이 지금 시대에서는 그나마 힘들고 어려워 보인다. 내가 더 그렇다. 나도 아이들을 사랑한다. 늦은 시간 잠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쳐다보면 이 세상 무엇보다 예쁘고 사랑스런 애들 때문에 내일의 힘겨움도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 해주고 싶어, 더 나눠주고 싶어 애태우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빠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빠의 하루 24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일, 힘들면 힘든 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가족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난 그렇게 살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혼내고 잘못을 얘기하는 아버지, 잘하면 잘 한 것을 기뻐하는 아버지, 아빠도 힘들다고 말하는 아버지, TV보다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아버지가 내가 꿈꿔왔던 아버지상이었고 내가 배운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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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기원
2005.12.13 12:46:02 *.61.95.164
아버지됨에 대한 동감.
나는 아버지에게 배움에 관한 많은 것은
살아오신 모습에서 내모습이 그대로 투영됨을 알게됨.
스스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좋은 방향의 선택을 할 수있게 돕는 것일 뿐?
이래라 저래라...이것은 교육이 아니었고 명령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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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렵고 어려운 자녀교육->그 대안을 연구하고 생각해보는 모임이 있습니다. 기회되면 함께 하는 시간 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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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12.22 13:39:55 *.248.117.3
이탁오의 말처럼 '친구같으면서 스승같은'아버지가 되고 싶은데 참 어렵네요.
먼저 가훈부터 새롭게 지어야 되겠어요.
학교에서 숙제로 적어오라고 해서 대충해서 줬는데 영 찜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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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2005.12.22 16:33:50 *.120.97.46
지난 11월에 있었던 '내 꿈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프로그램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나는 눈물을 쏟았다. 그곳에 와서 수정한 10대 풍광의 어느 부분을 읽으면서 그랬다. 눈물은 생각할 틈도, 난감함을 느낄 틈도 없이 흘러 내렸다.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릴 줄 정말 몰랐다. 그러나 눈물은 한 동안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 부분만 반복하고 더 읽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결국, 미영이 누나가 대신 읽었다. 누나가 읽는 동안 나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흘린 느닷없는 눈물, 서로 축하해줘야 하는 자리에서 혼자 흘린 눈물이었다. 어지간하면 참았을텐데, 나는 무너졌다. 나를 무너지게 한 풍광은 이거다.

"아버지의 칠순 잔치는 성대했다. 나는 큰 음식점 전체를 빌렸다. 나의 각별한 부탁을 받은 주방장은 정성껏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잔치에 오신 손님들은 다른 잔치에서는 받기 어려운 선물을 하나 씩 받았다. 나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한 번은 이렇게 하고 싶었다. 돈으로 마음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말고 누구에게 이렇게 해드리겠는가.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도 축하해드렸다. 나는 아버지를 위한 편지를 읽었다. 나는 솔직했다. 손님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봤다. 눈물이 흘렀다. 사랑이었다. 어머니를 꼭 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때 쯤이면 나도 결혼을 했을 것이고 아버지가 될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늘 집에 계신다. 6년이 넘었다. 다른 가족들과 대화도 없다. 아무도 아버지를 먼저 찾지 않는다. 가끔 나와 대화를 나누지만, 부족하다. 방에서 혼자 뭐하시나 궁금했다. 알아보니, TV 보고 한자 연습하고, 책도 읽으시는 것 같다. 아버지는 체질적으로 술을 전혀 못하신다. 40년 간 태우시던 담배도 몇 년 전에 끊으셨다. 무척 다행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운동을 하신다. 다행이다.

내가 눈물을 참지 못한 것은 내가 얼마나 나쁜 아들인지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참기 어려울만큼 나쁜 놈이기 때문에 눈물도 참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표현을 잘도 하는데, 아버지에게는 그러지 못한다.

노진 형, 글 읽고 나서 어렵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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