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빛처럼
- 조회 수 2400
- 댓글 수 9
- 추천 수 0
얼마전에 아이에게서 연우가 학교에서 화가 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아내가 아이의 마음이 참 착해보여서 너무 이뻤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사연인즉 이러했다.
연우 반에 자폐증상이 있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한아이가 교장선생님께 바라는 것을 적어서 발표하는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게 누구 누구를 교장선생님이 특수학교에 보냈으면 좋겠어요. "
참 가슴 아픈 이야기다. 내 딸아이 연우도 그것에 매우 화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를 했다. 다만 그 아이에게 이야기 하지는 말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너가 이야기 한다고 바뀔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왜냐하면 같은 친구레벨에서 고쳐줄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학기에 그런 문제로 선생님에게 면담 신청을 해서 만나뵌 적이 있다.
아이들이 정신지체가 있는 아이를 괴롭히고 그 정신지체가 있는 아이를 도와주는 아이들까지 괴롭히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는 것 같아서 한 번 찾아가 뵈었다. 사실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선생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것이라고 믿기에 말을 꺼내기는 참 쉽지 않았지만 내가 느꼈던 그런 느낌을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들을 너무 믿고 계셔서인지 모르겠지만 다 잘 하고 있다고만 하셨다. 믿고 기다리면 다 잘 클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내 생각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아이들이 그대로 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학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선생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학생은 그런 생각이 왜 문제가 있을 수 있는지 생각을 해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선생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야단치면 안된다(특히 매는 들면 안된다)라는 교육철학이 풍미하던 시절에 교육을 받으신 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어른이 어른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아마 세상은 더 살기 팍팍해 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입사원시절 해외연수랍시고 처음 갔던 미국에서 본 장면은 충격이었다. 문화탐방이라고 대중교통도 이용하고 그랬는데 그 큰 도시에 버스도착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도 장애인이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 버스 기사가 내려가서 특수한 장비를 사용해서 탈 수 있게 도와주는 것과 그 시간 동안 버스의 승객들이 아무도 그것을 뭐라고 하지 않고 기다려 주던 모습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이 아니라 나이드신분만 서있으면 버스를 세우지도 않고 지나치는 버스들이 부지기수였던 한국이었으니 말이다. 선진국이 달리 선진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도 평범한 아버지다. 내 애가 다른 애들보다 잘하면 좋고 내 애가 다른 애들 보다 점수를 잘 받아오면 기분이 좋다. 시험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매일 입에 달고 말하지만 시험이 끝나고 몇 점 받았는지 물어보다가 아빠는 말로는 점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왜 성적을 물어봐 하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는 왠지 너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이 내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특수학교에 보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이들이 많아진다면 세상 사는 것이 너무 팍팍해 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먼 미래도 아니고 바로 내 딸들이 살아갈 그 세상이 말이다.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 일에서만은 당당하게 다른 학교를 보내달라고 하는 아이보다 그것에 대하여 화를 낼 줄 아는 내 딸이 백번은 이쁘다.

어린 아이가 벌써 주변을 돌아보고 아직 알지 못하고 모든 상황을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먼저 타협과 절충의 자세를 갖으며 부족한 상대의 의향을 살피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모습이 매우 건강해 보입니다. 경쟁과 성과 위주와 목표달성에 늘 쫒겨 살아가는 세태와 생활 속에서 본래의 자기 생각과 학습에 대한 일상적(몸에 밴 일상의 습관적 일관적 태도로써) 의연한 품성을 지켜 가꾸며 가장 중요한 사회인 가정에서부터 배워나가게 해 주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그대는 훌륭한 아버지입니다.
장애를 나쁜 것,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성, 어느 특정인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과 천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힘겹게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만 여길 때, 거추장 스럽고 마지 못해 함께하는 쓸모없는 것으로 느낄 때 상대를 그들만의 세계에 보내어 사는 것이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고 어떤 것이냐에 상관 없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도와 주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곧 자연적인 생로병사로 인해서 병들고 지칠 때에도 가족이나 주위를 돌보고 살피려는 마음보다는 귀찮고 불편함을 먼저 앞세워 요양원에나 보내어 해결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만 결단을 내리고 마치 사회(나 아닌 다른 사람들)가 처리 해야 할 일로만 미루고 처신해 버리고 말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는 누구의 잘잘못이나 이유에 앞서 특수한 요구를 가진 필요적인 욕구라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모든 사람은 세상과 더불어 차별 없이 서로 어울려 살기 위해 저마다 자기만의 목적으로 평등하게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먼저 가르치고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지역사회 나아가 인류의 모든 환경이나 사람들은 어느 특정 대상자들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가르치고 이해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각 학교에는 특수학급 등의 제도가 있고, 그 대상의 아이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그가 원하고 요구하는 바의 수업을 받을 권리와 사회생활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며, 남들보다 더 잘남 혹은 앞서 나갈 수 있는 여건이나 재능이 있음은 자랑과 경쟁 우위의 덕목이기에 앞서 그 만큼의 의무와 모범적 행함도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임을 함께 가르치고 이해시키며 실제로 그런 일상이 우리들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잘 어우러져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그렇지 않기에 더 많은 희생을 치루며 애써 살아가면서도 특수 요구의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억울함을 항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기보다 이기적 외면이나 오히려 항변과 멸시 속에 살아가게 되는 수모를 겪을 수 밖에 없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소수의 특수 요구를 가진 사람들과 어느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들이 마땅히 감내해야만 하는 그저 그들만의 불운의 몫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 모두가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