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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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바뀌었네? 머리도 컷트 했네…”
내 방이 바뀐 지는 몇 달이 지났고 헤어스타일이 바뀐 것은 지난해의 일이다. 그녀가 나의 사무실을 찾은 것이 일년은 족히 넘었다는 말이다. 요즘은 고객이 금융기관을 찾아야 할 이유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은행의 찾아가는 영업”이 뉴스로 나오곤 한다. 은행 직원이 고객을 찾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찾아오는 고객수가 줄어들고 있는 영업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다. 객장을 가득 메운 은행의 모습을 이제는 보기 어렵다. 환경의 변화는 나의 일터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심하다. 계좌를 오픈 하는 일이 고객내점의 유일한 일이기도 하다. 나머지 일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가능하다. 사람과의 대면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요즘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2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친구. 실업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학교에 흥미를 잃었고 자연히 학교공부는 뒷전인 학생이었다. 실기위주의 커리큘럼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 현실부적응자였다. 그렇다고 수업시간을 뻬먹거나 다른 말썽을 피우는 학생도 아니었다. 그냥 존재감이 없는 학생.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그런 학생. 스스로는 학교를 다녀야 하나 다시 인문계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용기도 내어보지 못하는 그런 어린아이였던 것 같다. 나의 고민을 중학교 담임선생에게 편지를 해본 경험은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설득할 용기도 내어보지 못했었다.
특별함 없이 왔다갔다하던 학창시절이 흘러가고 있을 즈음 내게 다가온 친구이다. 내게 다가왔는지 내가 다가갔는지 기억이 없다. 분명한 것은 학교에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녀는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무슨 목적이 있었다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렇게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기분으로 다닌 학원, 학과공부, 덕분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그녀는 취업이 되었다.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고등학교에서 우등생은 좋은 취직자리가 빨리 찾아온다. 그녀의 조기 취업은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친구가 사라져버린 교정은 넓은 운동장만큼이나 내 마음을 휑하게 만들었다. 나는 학교로 등교를 하는 시간에 그녀는 회사로 출근을 했다. 그녀는 토요일 오후에 학교에 들르곤 했다. 출석을 위한 최소한의 등교이다. 토요일 오후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언젠가 만난 친구엄마는 “길수야, 고등학교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네가 편지를 했었는데 이제는 결혼해서 아이 엄마가 되었구나. 그런데 어쩌냐 우리 애는 저렇게 아직 혼자라서”라고 말씀 하셨다. 내가 그때 그렇게 열심히 연애편지(?)를 썼나 싶다. 편지질을 좋아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보다.
일찌감치 국내 굴지의 종합상사로 취업을 나간 그녀와 달리 나는 졸업 즈음에 겨우 직장을 구하는 행운을 얻었다. 서로 다른 업종이기도 했지만 사회초년병의 쉴 틈 없는 업무강도는 서로의 만남을 가로막았다.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걸로 우리의 청춘은 지나갔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그녀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아이 둘을 낳은 나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때부터 인듯하다. 그녀가 결혼은 하고 이미 오래 전에 결혼생활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던 때 말이다. 결혼은 빨리 하나 늦게 하나 맞닥뜨리는 부분이 있다. 모든 기혼여성들에게서 자유롭지 않은 시댁식구들과의 일이다. 유독 예민하게 구는 친구의 상담자가 되었다. 또한 일정규모의 자산을 모을 시간이 있었던 나이에 한 결혼은 금전적인 문제도 두 사람 사이를 힘들게 했다. 늦은 결혼이라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서로의 자존심을 세우게 되고 그렇게 그녀는 점차로 시들어져 가고 있었다.
돈.
돈 만큼 많은 의미를 내포한 물건도 흔치 않다. 좋은 돈 나쁜 돈이 있지 않음에도 돈은 늘 그것이 좋은 돈인지 나쁜 돈인지 냄새를 피운다. 사람마다 돈이 가지는 가치는 다르다. 누구에게는 피 같은 돈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돈보다 더 피 같은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이겨낸 그녀는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 동안 친구부부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갔다. 그녀의 남편은 중소기업을 하던 이였다. 사업을 하면서 급전이 필요한 일이 생겨나고 그런 일들이 그녀를 힘들게 했었는데 이제는 제법 규모가 되는 기업으로 성장해있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를 늘리게 되고 당시 저리로 조달할 수 있는 해외자금으로 제2공장을 마련했다. 해외자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사업이 내리막을 탔다. “초 저금리”라는 매력 때문에 사용했던 자금이 오히려 환율의 역풍을 맞아 대출원금을 두 배로 늘려 놓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마저 하강기로 접어들었다.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었다.
그녀가 다시 나를 찾았다.
자신이 풀어야 하는 수많은 과제를 가지고 말이다. 친구로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자역할도 필요했고 자금흐름이나 세금에 관한 조언을 하는 일도 필요했다. 적법과 불법 사이에서 조언을 해야 한다. 경계를 넘지 않아야 하는 일이니 조심스럽다. 이런 경우에는 솔직함이 담보되지 않으면 상담진행이 어렵다. 다른 전문가와 그들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들 부부가 모든 것을 오픈 하지 않는구나’ 상담을 진행할 이유가 없어졌다. 어렵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까지는 내 몫이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니 내가 뭐라 할 말은 없다. 다만 동행한 사람에게는 미안하고 친구에게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취하기 위한 행위라고 생각되면서 내 마음도 그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뜸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잘 끄고 살고 있나 보다. 다시는 자신들의 고민이었던 일에 대하여는 말이 없다.
그녀는 가끔 전화를 한다.“필리핀에 아는 사람 없니?””안전하고 수익률 좋은 채권 없을까?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함이다. 이미 내게 와 있는 자금을 관리하는 일은 내 일이니 금융상품을 물어오면 답을 해 준다. 보통의 일은 전화로 끝이 난다.
“내가 지금 남편 병원일 보느라 서울에 왔는데 사무실에 있니? 내 계좌현황 좀 뽑아 놓아줄래?”
몇 달 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
잠시 후 나타난 친구의 말이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바뀐 내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왔을 게다. 이제 우리는 주름살이 먼저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친구얼굴의 주름살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우리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생각하며 그녀의 휴대폰을 보았다. 핑크색커버를 씌웠는데 제 짝이 아니었는지 크기가 맞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돈을 잘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특히 자신에게는 더 돈을 쓰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던 말이 생각났다. 한창때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하고 있지만 돈이 궁할 친구는 아닌데 말이다. 볼일을 보고 가면서 한마디 한다.
“사은품은 없어? 통장지갑이 필요한데…”
“어…사은품이 없네. 너는 통장지갑을 매번 찾더라.”
지난번에 친구에게 통장지갑을 주었었는데 볼 때마다 찾는다.
“통장지갑에 통장을 넣어 놓으면 보기가 좋챦아”
고객 중에 친구나 친지가 몇 사람 있다. 고객이기 이전에 친구이고 친지라는 것 때문에 불편함이 있다. 내 생각만은 아니고 고객인 친구, 친지의 생각도 같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있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을 충족시켜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감정이다. 왠만하면 잘 아는 사람을 고객으로 모시기 어려운 이유이다. 돈과 관련된 일은 다른 감정이 섞이면 심플해지지 않는다. 돈을 벌어주고 싶은 사람 계좌의 성적표가 더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돈벌이의 어려움이다. 돈과 사람 모두를 얻는 것은 역시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