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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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네가 왔다간 이후에 난 좀 아팠다. 너의 큰 목소리가 내 귀에 울려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아플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다른 일로, 몸이 조금씩 축나 있었지. 지금은 가뿐하다.
나는 너를 오래도록 부러워했어. 그런데 너는 나를 부러워하는 것 같아. 그걸 생각하면 참 우습다. 사람마다 때가 있나봐. 난 네가 축복을 받았다고생각해. 흔들림없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보낸 것을 말이야. 예전에 내가 너에게 넌 아침에 무엇을 먹고 왔냐고 물은 적 있었지? 난 그게 진짜 궁금했어. 점심은 같은 식당에서 배달시켜 먹으니까, 분명히 아침에 넌 내가 모르는 뭔가를 먹어서 활기가 넘치고 많이 웃었던 것이라고 여겼거든. 너의 답변이... '정화야, 난 네가 먹는 거 먹어.' 그게 뭐야! 난 정말 그때는 이해가 안 되었어. 그런데 지금은 그게 뭔지 알 것 같아.
네가 그림엽서를 받고, 드로잉에 대해서 묻고 그런 게.... 난 조금 미안해졌어. 그리고, 네가 나를 부러워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야. 네가 드로잉 북 보여주며 선긋기를 물어봐서 그것도 미안했어. 난 자꾸 미안한 것들 뿐이네. 그건 내가 그것이 네 것이 아닐 거라는 짐작이 들어서야. 그림그리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데, 너에게도 그럴까 생각해 봤거든. 네가 그림그리면서 그 순간에 행복하다니 그건 다행이었어. 네가 있는 곳이 외로운 곳이기 때문에 그럴 거라 짐작했어.우리는 외로운 나이잖아. 41세의 미혼. 가족과 떨어져서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그 일이 내가 잘하는 일인지 궁금하고, 돌아보면 회사에서 하는 일이 잘하는 것 같지는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고. 선배들을 보니 앞으로 내 10년이 그와 비슷할 것 같고, 얼마전 들어온 후배를 보니 내 과거 10년은 어땠나 객관적으로 보이고. 밤에 퇴근하면서 별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답다는 게 왜이리 차갑게 보이는지...... 난 우리가 그런 시기에 들어선 것 같아. 그래서 뭔가 찾아보려 하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 시기 말이야.
넌 외로워서, 그리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림을 배워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르지. 네가 선긋기가 좋았다고 한 것은 그 순간에 느껴지는 긴장과 조용한 중에 몰두할 때 너를 발견하는 것이 좋아서 였다고 봐. 네가 좋아하는 것을 그렸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것을. 정말이지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렸으면 좋겠어. 그러면 더 재미날 거야. 그러면 더 행복할 거야. 그럼 외롭더라도 그 시간이 괜찮은 시간일거야.
넌 나처럼 수련할 이유가 없잖아.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리면 되잖아. 단지 그 시간을 즐겼으면 좋겠어. 주변의 나무들, 나뭇잎들, 식물들, 야생화를 관찰하고 그리고 싶다고 한 거 기억난다. 그거면 좋겠네. 너와 잘 맞을 거 같아. 넌 자연 속에 있는 거 좋아하잖아. 그리고, 네 일은 자연속에서 그것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로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을 거고. 좋아하는 것을 그리다가 그 속에서 자신을 하나씩 발견했으면 좋겠어.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듯이, 그리면서 자신을 찾아갈 수도 있거든.
아마 넌 나와는 다른 취향의 그림을 그리게 될거야. 분명히 그럴거야. 그림이 아닌 다른 뭔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지. 내 바램은 그림이 아닌 다른 뭔가를 사랑하게 되었으면 하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려보다가 거기에서 정말 너를 즐겁게하는 것을 찾아가는거지.
다음에 또 만나면 우리가 드로잉 이야기를 할까? 당분간 넌 선긋기를 할 테니까, 그리고 나 또한 계속 그리고 있을 테니까, 만나면 하게 되겠지. 그때는 좋아하는 것에서 발견한 다른 이야기를 하자. 그림이야기이긴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오래도록 너와는 꿈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부러워해왔기에 나는 너에게 꿈에 대해서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아니, 너를 만나서는 단편적으로만 말하겠지.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적어둘께. 우린 만나면 그냥 같이 밤길을 산책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바다를 보러가자.
어제는 반바지 입고 다니는 게 좋았다. 어제는 창문 열고 놓고 자는 게 좋더라. 여름이다. 바다 보고 싶다. 놀러갈께.
- 2013. 6. 7. 서울에서
정화선배님,
다른 글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드는 뭐랄까...
더 따뜻하고 더 감성적인 글이네요.
특정한 대상이 있는 글이어서 더욱이 그런가봐요.
저도 어릴 때부터 로망(?)이 예술가여서
얼마전 드로잉 과정 시작했다가 초반에 포기했습니다.
역시... "한번, 해볼까?'" 정도로는 안되는 거 같아요.
정말 내 마음을 울리고 뛰게하는 그런 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친구분도... 또 저도.
그런 의미에서 정화님이 참... 부러운 오후입니다 ^^*
P.S. 예술이란 우리 삶을 아름답게 조명해보는 모든 '창작' 활동을 포함할테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내 삶을 아름답게 디자인한다면 그것 또한 예술이겠죠?!
좋아하는 게 참 많아서 그중에 하나 골라잡은 게 이렇게 되었네요. 뭐 그러면 어때 그 속에다가 다른 것도 담으면 돼지....
"예술은 지성이 아니라 영혼의 영역이다. 자신의 꿈이나 비전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이미 성역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보다 큰 힘과 에너지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모임은 일종의 성스런 보호구역이다. 이 구역 안에서 우리는 안전을 느끼며 변화의 에너지를 충전 받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꿈의 산파이며, 서로의 창조성이 꽃피도록 돕는 지지자다. "
드로잉 모임을 준비하면서 줄리아카메론의 <아티스트웨이>를 봤어요. 모임에 룰이란 항목들에서 이런 말을 봤어요.
그래서 꿈을 이야기할 때는 느껴보려구요. ^^*
라비나비님은 목소리가 참 커요. 우렁차요. 본인의 목소리에 힘이 잘 실리는 거 그걸 따라가보면 가슴이 먼저 알아보는 그녀석을 만날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