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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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7.
말은 언격言格이며, 글은 마음의 그림이다. 오미경 2013.07.22
우선 재미있는 우화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옛날에 입과 코와 눈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입이 말했다.
“이 세상에 맛있는 것들은 내가 없으면 절대 맛볼수 없어. 그러니 내가 얼마나 훌륭해? 안그래? ”
그러자 코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해도 이 코로 냄새를 맡아주지 않으면 다 소용없어. 안 그래? 그래서 내가 네 위에 있는 거야.”
입은 아무 말 못했고, 코는 킁킁 소리를 내며 으스댔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눈이 살며시 눈웃음을 치며 코와 입을 향해 쏘아붙였다.
“그럼 말이야, 만약 그 맛있는 것들을 이 눈으로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내가 보지 못하면 코가 냄새를 맡을 수 있어? 또 입이 먹을 수 있어? 그래서 내가 너희들보다 위에 있는 거야!”
코도 입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입과 코와 눈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제히 눈썹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갸우뚱 고개를 흔들다 동시에 볼멘소리로 말했다.
“야, 쟤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데 어째서 우리 위에 있는 거지?”
코도 입도 눈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눈썹이 뒤통수를 긁으며 미안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내가 너희들 밑에 가 있다고 생각해봐. 얼굴 꼴이 뭐가 되겠니?”
우리 얼굴의 윗부분부터 살펴보면 눈썹이 제일 위에 있으며 한 쌍이다. 차례로 한쌍의 눈과 두 개의 코구멍과 양쪽에 두 귀가 있으며 마지막에 세치의 혀와 입이다. 이는 세상을 두 눈으로 잘보고 잘 듣고 냄새를 잘 맡고 판단해서 신중히 말을 해야 함을 뜻해서 순서대로 배열 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몸의 각 부분은 한 쌍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는 반면에 세군 데만은 하나뿐이다. 이 셋중에 하나를 함부로 놀리거나 잘못 사용하면 패가망신이다.
예를 들어 작년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은 중국 여인과 연애하다가 국가기밀까지 빼주지 않았던가. 이 세가지중 한가지를 잘못 놀려 한국이 중국내에서 얼마나 망신살을 뻗쳤는가. 클리턴과 르윈스키의 예에서도 뭐 하나 잘못놀려 한 국가 뿐 아니라 전세계 이목의 집중을 받고 지위까지 흔들리지 않았던가.
‘말은 마음의 소리’다. 실수로 말을 잘못했다는 것은 없다. 모든 무의식적인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에 실수로 했다는 말은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 이성의 지배를 벗어나 무심코 나온 것이다. 결국은 ‘실수로 한 말은 진심이다’ 라고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눈을 보면서 인사를 한다. 인사를 하는 순간부터 혀와 입이 내 몸과 마음을 대변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혹은 나이가 어릴듯 하여 성(性)이 다른 이성異性에게 대뜸 뒷말이 짧다는 것은 평소의 생활태도에서 나온다. 또한 여러 사람에게 보내는 글도 뒷말을 짧게 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아왔다.
반말을 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떠할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위에 있고 더 낫다’ 라는 무의식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억제된 에너지를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발산하며서 해소하고자 할 수 도 있다. 이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점을 상대방에게 내보이고 싶어 하는 심리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의 인격이나 능력보다는 먼저 시작했다는 선배의 우월의식이나 한 조직에서 오래 있다 보니 잘못된 관행으로 익숙해진 문화에 젖어드는 경향이 있다. 이때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반말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어느 정도의 조건을 갖췄다 싶으면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은 사람들은 남에게 자신을 내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무턱대고 상대에게 반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상시보다 겸허하게 행동한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뒷말은 자연스럽게 짧아질 것이다. 자신은 편하게 말한다 해서 뒷말이 짧을 수 있지만,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편하지 못하다면 어찌할 것인가. 말은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언격言格이 인격人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상대방을 존중해주지 않는데, 어찌하여 상대방의 존중을 받으려고 할 것인가.
혀는 칼보다 강하고, 말은 총보다 무섭다. 혀는 부드럽다. 그 부드러운 혀가 생각없이 함부로 놀리면 자신의 언격은 지하 암반수로 떨어지고 씻겨져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부드러운 혀가 상대를 존중해주는 말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성간에 연애를 할 때도 입과 입이 만나고 혀와 혀가 만나서 서로의 마음과 몸을 열지 않던가.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부드러운 혀와 입을 잘못 놀려,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인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이 이릉의 변을 변호할 때, 상대인 한무제가 사마천의 말을 들어줄 만큼 깨어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왕좌에 너무 오래 앉으면 그 총명함은 빛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16세에 즉위한 한무제는 이릉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재위한 지 43년, 나이가 58세였다. 이 무렵부터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에 앉은 폐해가 이 위대한 황제를 좀먹기 시작했다. 무제는 신선사상에 몰두하고 사치를 탐했으며, 총희 이부인에게 빠지는 등 기이한 말과 행동을 일삼고 이미 판단력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미 부패해버린 무제의 변모를 보지 못했다. 그때까지 사람의 심리를 읽고, 어둡고 끔찍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태사령 사마담의 아들로서 유소년 시절부터 역사가가 되기 위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자라서는 각지를 여행했으며, 아버지를 여윈 다음에는 뒤를 이어서 수월하게 태사령이 되었다. 사마천의 인생은 47세 이릉의 사건에 연루되기 까지 권력지향과 인연이 없는 역사라서 극히 순조롭고 심각한 좌절과는 무관했다.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입신출세와 보신을 꾀하는 조정의 교활한 정치 관료, 문화 관료와는 근본부터 다른, 좌절을 모르는 사람의 무방비가 도리어 사마천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말을 한 것은 충신으로서 간언을 한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담긴 충언(忠言)도 한무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인지를 판단했어야 했다.사마천은 <노자 , 한비 열전>에 자신의 경험을 본보기삼아 이런 글을 썼다.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한무제는 권좌에 오래 있다 보니 백성을 위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정신은 희미해졌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새로운 물이 들어와서 그 고인물들을 정화하지 않으면 부패하고 냄새나기 마련이다. 오랜 나쁜 관행으로 그 조직은 서서히 병들어 간다. 슬프게도 누군가가 바른 말을 하고 튀는 언행을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꾸짖거나 기피대상이 된다. 이런 조직에서는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줄 좋은 문화가 자리 잡기 어렵다. 문화는 인간을 세련되게 만드는 정신적 힘이다.
사마천은 궁형을 계기로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더 큰 불행은 아버지의 유언인 역사서를 쓰지 못함이요, 작은 불행은 죽음보다 더 한 치욕인 궁형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또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결국 죽음과 삶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사마천은 죽음이 삶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단. 죽음을 이용하는 방향과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있어야 삶의 질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죽음은 인간의 정신을 집중하게 만든다’. 한 인간이 당한 지독한 불행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역사에 남을 업적으로 운명을 바꾼 사기는 <피>로 쓴 책이었다.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날 사서를 쓰겠다는 결심이 ‘대장부 사마천의 태산과 같은 선택‘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마천이 불후의 역사서를 쓴 까닭이다.
말의 실수로 한 인간이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글로써 사마천 자신의 존재이유를 피로써 썼다. 어쩌면 사마천은 글로써 한무제에게 화려한 복수를 했다.
우리는 이런 인물들이 빚어내는 드라마틱한 시대의 변화상과 파란만장한 삶을 보면서 역사와 지혜를 배우며, 삶을 배우고 죽음을 배우는 것이다.
말은 입과 혀를 사용해서 나온다. 말이 되기까지는 생각이라는 사유의 길(思路)을 거친다. 생각의 길이 달라지려면 말이 달라져야 한다. 말이 달라지면 생각의 길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유하는 바를 말하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든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든 글과 말과 생각은 익어야 한다. 오래동안 익어서 나오는 말과 글은 그 사람의 깊이와 인품에서 우러난다. 말이 달라지면 사유의 길이 달라지고 인생의 길도 달라진다.
손에 뭘 들고 있느냐? 손에 든 칼로 사람을 찌른 것이 아니라, 그 찌르려는 마음이 연장되어 손으로, 칼로 이어진다. 그러니 마음이 찌르려 했다면 찌르는 것이고, 마음이 그걸 이용해 요리를 하려 했다면 요리를 한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우리의 말은 그렇게 마음에서 몸통으로, 울대를 거쳐서 바깥으로 나온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모두 친구에게 하듯이 무심결에 반말을 해버리는 것과 같이요.
갑자기 든 생각. 사마천 예가 앞으로 가고, 중간에 나온 누나의 생각이 뒤로 가면 어땠을까 라는...
현재의 구조는 글이 뒤에 가서 조금 출렁인다는 느낌?! ^^::
전 사람들에게 반말을 쓰는 편이 아닙니다. 회사에서도 그렇지요. 입사 1년차 후배들에게도 존대를 하지요.
입사 4년차쯤이었을까요. 제 부사수와 일한지 1년이 넘었는데 부사수에게 여전히 존대를 하였습니다.
그 녀석이 이야기하더군요. " 대수 계장님, 왜 저 한테 말을 안 놓으세요?! 제가 불편하세요?! 전 대수 계장님의 존대가 싫습니다."
그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제서야 또 다시 알았습니다. 지나친 존대는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하거나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권위적이어서 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얼마 전엔 어떤 선배가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 왜 저한테 존대말 쓰세요?! 제가 불편하세요?!"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뉘앙스였던 것 같습니다. 전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결코 ^^::: 그냥 제 스타일인게지요)
반말만 불편한건가 싶더니 존대말도 불편할 때도 있네요.
역시 사람 성향의 문제 인가 봅니다.
끈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한 점으로 향하게 되겠지요?!
결국, 잘 되리라고 봅니다. 전...... 끈을 놓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
p.s 숙제가 없으니, 자세히 읽고 생각하고 댓글을 달게 되네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