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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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늪에서 피어난 꽃 / [1-1 컬럼]
“요즘 세상에 저런 사람이 어디 있겠니?”
영화가 끝나고 걸어 나오는데, 뒤에 따라오던 어느 모녀의, 작은 대화가 뒤통수에 꽂혔다.
‘울지마 톤즈’
의사이자 사제였던, 한 남자의 삶에 대한 영화였다. 실제 이야기인 다큐멘터리를 좀 전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일까? 딸에게 무심코 건네는 어머니의 말 속에, 각박한 사회의 분위기가 전해졌고, 이 영화가 조용히 퍼져나가는 이유를 깨달았다.
연구원 활동을 하며, 심적인 부담 탓인지, 2010년은 영화를 한편도 보지 못할 뻔 했다. 그러나 이 영화만은 꼭 보고 싶었다. 다행히 병원근처 영화관에서 조조로 1회만 상영되는 것을 알게 되어, 지난 주 (2010.12.30)에 휴가를 내고 관람했다. 단 한편의 영화로 한 해를 마무리했지만, 그 어느 해보다 의미있는 해가 되었다. 영화 관람 후, 인터넷으로 방송된 프로그램을 다시 보았고, 그가 암 투병 중에도 수단의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쓴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도 한 호흡에 읽었다. 주말에 무리해서 몸은 무자게 피곤했지만, 마음은 몹시 개운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면, 꽃이 핀다. 또한 그 사랑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면, 그 꽃은 불꽃이 되어 세상에 더욱 널리 퍼져 나간다.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하며 불꽃처럼 살다 간, 한 남자의 생애와 그 꿈을 다시 되짚어 본다.
# 꿈
그의 고향은 부산이다. 어머니는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은 그에게 놀이터였다. 거기서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1840~1889) 신부에 대한 영화를 봤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근처 몰로카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에 숨을 거둔 인물이다. 지난해 교황 베네딕토16세는 그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이 신부는 그 영화를 본 뒤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께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부가 된 형도, 수녀가 된 누이도 있었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남의 아들은 (신부님들이) 다 훌륭하고 거룩해 보이던데…, 왜 내 자식은 몇 명이나 데려가시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머니께 효도 못 하고, 돈을 벌어드리지도 못 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하느님께 자꾸 마음이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 고 울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남부 수단을 자원해 부임한 이태석 신부. 그는 인턴 생활까지 마친 의사였으나,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고, 신부가 되자마자 수단의 ‘톤즈’로 향했다. 이 신부가 ‘톤즈’로 간 이유는 1999년 신학생 시절 첫 방문시 느꼈던 충격과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부서진 건물과 수족이 없는 장애인, 거리를 누비는 헐벗은 사람들, 학교가 없어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 나환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인간적인 의지를 넘어 선, 다른 차원의 특별한 미션을 느꼈다.
그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 이곳으로 꼭 돌아오리라’ 는 강한 다짐을 가지게 된 것은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인간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안에 살아 움직이고 계시는 신비스러운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 불렀다. ‘존 리(John Lee)’라는 영세명 (세례자 요한)을 그렇게 발음한 것이다.
#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게 황폐해졌다. 특히 남수단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 등으로 약도, 치료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 신부는 남수단의 톤즈로 갔다. 그는 톤즈에서 유일한 의사였다. 톤즈는 석기시대를 사는 것처럼 방치된 삶이었다. 오염된 물을 먹으며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과 말라리아, 결핵, 한센병으로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병원을 지어 하루에 300 여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 100㎞를 걸어서 밤에 문을 두드리는 환자도 있었다. “그곳에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톤즈에 퍼졌다.
이태석 신부는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 직접 환자를 찾아가 접종을 해주었다. 백신보존에 필요한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없는 톤즈의 건물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하여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환자들의 아픔을 좀 더 잘 듣기 위해 그들의 말인 딩카어도 열심히 배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꾸려가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진료는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계속되었다. 병과 싸울 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노력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신부는 학교도 지었다. 초·중·고 11년 과정을 꾸렸다. 직접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케냐에서 정식 자격증을 지닌 교사도 데려왔다. 톤즈의 아이들은 거기서 미래를 찾았다. 현재 1400 명의 학생들이 그가 설립한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 신부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를 먼저 지었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학교, 그런 학교를 말이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 이태석 신부 인터뷰 中 -
# 음악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방송은 노래로 시작하고 있었다. 말기 암 환자였던 故 이태석 신부가 죽기 3개월 전, 그의 후원자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 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애닮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위로하는 노래였다.
음악은 타고 난 재능이었다. 독학으로 풍금을 배웠고, 중학교 때 독창과 작곡을 해서 콩쿠르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음악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긴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등의 악기들로 구성된 서른 다섯명의 브라스 밴드..그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주기 위해 악기 설명서를 보고 독학을 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모든 악기들의 기본 스케일(음계들의 자리)을 익혔고, 그것을 토대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재능으로만 여길 수 없는 기적같은 일이다. 그러나 이 신부는 오히려 너무나도 쉽게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사랑과 기적을 느꼈다. ‘아이들의 피 안에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고 말하며...
밴드를 시작하고 두달 쯤 지나 클래식 성가인 ‘천사의 양식 Panis Angelicus’ 을 연주하면서 그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 충만함으로 전율했다. 그건 천상의 음악이었다. 함께 연주를 한 아이들의 눈에도 감동의 눈물이 흘렀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총’과 ‘칼’을 녹여서 ‘악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밴드는 정부의 공식행사에 불려 다닐 만큼 유명해졌고,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전쟁과 가난 속에 찌든 아이들에게, 브라스 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휴가를 위해 귀국했다가 지인의 권유로, 건강진단을 했던 그는, 자신이 ‘대장암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암 발병 여부를 알리지 않고, 톤즈에 고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선모금 콘서트에 나가, 담담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꿈의 대화’ 였다.
‘외로움이 없단다. 우리들의 꿈속에..서러움도 없어라 너와 나의 눈빛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함께 나누자..너와 나 만의 꿈의 대화를...’
오래 된 한국의 가요 ‘사랑해’ 가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인줄은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이 신부가 톤즈의 브라스 밴드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노래가 ‘사랑해’ 였다. 예~예~예 화음에 맞추어 다리를 흔들고 춤을 추는 흥겨운 모습도 보였다. 아이들은 이 신부의 투병과정과 장례미사 과정을 영상으로 보고 나서, 그를 향한 예를 갖추겠다며, 피리 연주와 함께 한국어로 ‘사랑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 삶의 향기
한국의 진료 시스템에서는, 약만 처방하는 내과 환자들을 응대한다고 해도, 하루 200명을 진료하는 것이 어렵다. 수술과 처치행위가 많은 외과 환자는 하루에 100명을 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의 환자는 주로 수술과 외과처치가 많은 환자들이었다. 하루에 3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깊은 밤에도 환자가 찾아오면 자신의 방문을 두 번 두드리게 한 적이 없었다.
발이 뭉그러져 형체가 제 각각인 한센병 환자들의 발에, 일일이 직접 발의 크기를 그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발을 신겨 주었다. 전쟁 소년병으로 끌려갔던 아이 손에 트럼펫을 쥐어주고, 총 쏘는 법 대신 한국의 가요 ‘사랑해’ 를 가르쳤다. 그의 부재는,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톤즈 사람들에게 굵고 진한 눈물을 흘리게 했고, 인터뷰하던 방송국 사람들과, 그의 삶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한국에도 불쌍한 이들이 많은데 왜 하필 아프리카냐고 물으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어떤 향기에 이끌렸다고 말한다.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왜 꼭 신부가 되실 결심을 하셨나요?”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가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어릴 때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
마지막으로 10남매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다.“
단 한 사람을 통해서도, 우린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사랑은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그의 삶 자체였다. 그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에는 친필사인이 아래와 같이 인쇄되어 있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
눈물로 눈물을 맞이하는 영화였으나, 슬픔만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늘 웃고 있었다.
아이의 다친 머리를 꿰매면서도 ‘피부가 까매서 실이 안 보인다’ 며 스스럼없이 장난치고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슬픔의 늪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었다. 48세의 짧은 생을 불꽃처럼 모두 태우고 간 남자!
고3 때 직접 만든 그의 노래가, 한번 더 그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묵상 (작사.곡 : 이태석 신부)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브라스 밴드 단원들과 함께]

자꾸만 눈을 피하게 되요.
왜냐구 왜냐구 자꾸 물었더니 내 안의 내가 퉁하니 답을 던집니다.
눈물이 나니까.
그냥 그래요. 오빠를 보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해요.
이 글을 읽고나니 이젠 내가 내 안의 조그만 녀석에게 해 줄 말이 생겼네요.
그는 흐르는 사랑이야. 사랑이 피한다고 피해지는 거니? 그냥 몸을 적시는 거야.
비를 맞아본 사람은 알지. 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비는 굳이 견디지 않아도 애써 버티지 않아도 자신을 원하는 세상을 다 적시고 강으로 가지.
시원하게 내리는 비.
벌써 우산접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축하해요! ^^
P.S. 이제 통역은 필요없으시죠? ^^
P.S 2. 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와서 다시 읽으니 통역이 좀 필요할 듯. ㅋㅋ
아닌가? 필요하시면 전화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