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 조회 수 231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너는 나의 미로
수국은 만 오천원이었다. 화원은 버스 두 코스 거리에 있다. 걸어가면 새로 심은 상추가 오글오글 올라오는 걸 볼 수 있으련만 오늘은 갈 길이 멀다. 농장에서 몽오리진 수국분을 20개 들였다는 주인은 내가 산 3개 말고 나머지는 그 마당에 피고 있단다. 아무래도 여기가 외지다. 지난 번에 아이들과 심을 모종 사러 와서 덜 주고 간 만 원을 계좌 송금한 걸 다시 인사 듣는다. 떼먹을 줄 알았던가? 당연히 보내는 건데 빚을 갚아줘서 고맙다는 건 무슨 말일까? 아무래도 그가 선량하거나 외로운 사람인 듯. 호접란과 수국 중에서 잠시 망설였다. 어버이날 카네이션 바구니 대신으로 사는 거니 수국이 낫겠다. 비닐로 검정 화분 아래를 싸준다. 경기도와 인천 접경의 전철역으로 데려다줄 시내버스가 장수대공원 앞에서 유턴할 때 수국 화분을 아기처럼 무릎에 앉혔다. 전철에서, 용산에서, 옥수에서 갈아타며 걸을 때는 아기띠를 앞으로 맨 사람처럼 안고 걸었다. 팔목이 떨어져나갈라 한다. 허리가 좀 그석하다. 땀이 뻘뻘 난다. 의자가 나면 잠깐 고개를 뒤로 꺽고 입을 벌리고 졸았다.
한정식 집은 1번 출구로 나가야 했다. 지하에서 나오는데 밖이 어슴프레 하다. 해가 길어지긴 길어졌다. 신장개업한 식당은 출구 바로 앞에 있었다. 계단에서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팔고 있다. 파니타 닮은 게 있어 들여다본다. 꽃이 좀 다르게 생겼다. 분홍 안개꽃인가? 아무 날도 아닌 때 연분홍 카네이션을 한 다발 사서 꽂아놓고 한가로이 들여다 보면 좋겠다. 또 다른 아무 날도 아닌 날 노랑 장미도 한 다발 사서 항아리에 두고 보면 기분 좋겠다. 사람보다 꽃을 먼저 보고 있던 나에게 그가 다가온다. 짐을 들었을 때는 그거 먼저 받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내 얼굴을 보고 활짝 웃기만 한다.
그가 화분을 받아 안는다. 안에 있는 식구들이 좀 기다린 듯 하다. 그는 또 늦냐는 추궁을 인내하는 표정이다.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밖에 나와서 언제나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몸만 힘들고 마음 힘들 거 없이 잘 들고 왔는데 사람을 보니 투정이 난다. 칭찬과 궁디팡팡을 기대한다.
"근데 정말 싸게 샀다요. 만 오천원. 싸죠?”
“종로꽃시장이 더 싸”
그가 대답한다. 순간 내가 부르르 한다. 갑자기 팔이 더 아파진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죠. 이쁜 거 보면서 쉬시라고 버스 2번에 전철 3번 타고 사들고 온 건데 ‘이쁘다’, ‘좋아하시겠다’ 말해줘야죠. 치”
그가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는 여자형제 없이 자라 남자학교를 나와 남초 직장에서 전반전을 보냈다. 자신과는 다른 여성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볼 때, ‘금성여자 화성남자’ 이야기를 몇 번 했었다. 모든 게 너무 다르다 했다.
“미안미안, 내가 연애를 많이 안해 봐서 말을 남자친구한테 하듯이 한다니까요. 미안해요.”
내 눈알에 눈물이 왈칵 코팅된다. 남사스럽고 이상하게도 이 사람에 대해서 이런 생경스런 반응이 불쑥 나온다. 나중에 그에게 좀 과장해서 떠벌리느라 ‘집어던지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 단 한 짬도 화분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어린 수국이 너무 이뻤다. 협박용이다. 근데 왜 그에게 이런 협박성 멘트를 하는 걸까? 잘못하다가는 우리 아버지와 엄마가 늘상 했던 그 대화 무드를 내가 재현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귀가 아팠고, 왜 저렇게 둘이서 말이 안 통할까? 왜 둘이서 서로 상처주고 따지지 싶었다. 그럴 때도 나는 늘 아버지 편이었다. 편들기에는 이유가 없었다. 공평하지도 않다. 그저 나한테 잘해준 사람 쪽에 선다. 문득 두려워진다.
“잠깐만 여기서 숨 좀 고르고 들어가요.”
눈길을 사람에게서 거두어 하늘로 보낸다. 내 항아리가 뒤집혀서 속에서 흙탕물이 좀 일었다. 내 안에서 복잡하게 오가는 작은 목소리들. 또 내가 갖고 싶은 걸 남에게 선물하고 있는 건가? 10송이가 든 이 수국화분이 갖고 싶어서 ‘내가 생일선물로 수국화분 사올 거니까 나 돈 줘요’라고 말했더니 그가 종로꽃시장에 나가서 1송이짜리 수국 화분 2개를 사왔었지. 모종 살 때 산 수국은 학교에다 두었고. 근데 보조선생님이 또 수국을 좋아하는 분이어서 내 옆이 아니라 그이 옆에다 두었어. 그녀가 애지중지 하니 좋긴 좋았어. 다른 이들이 반길 거라고 생각하고, 내게 줄 선물을 남 주고 있나? 어버이날이라고 시댁식구들과 식사를 하는데, 내 부모와는 그러지를 못하겠구나. 여자에게는 시댁에 전화를 1주일에 한 번에 걸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의무가 주어지는데 남자에게는 처가에 명절, 생신 같은 무슨 날 때만 안빠지고 찾아 뵈면 된다는 허용이 있는 듯 하다. 똑같이 직장 다니는데 어쩐지 결혼 관계에서는 여자가 더 복잡하고 고달프고 손해를 보는 듯 하다. 그는 본인 가족과 더불어 즐거운데 나는 서먹하고 좀 슬프다.
한정식은 거의 1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나는 식사를 짧게 간단히 해 치우고 노는 편이다. 저녁에는 머리 안돌고 소화도 안되고 일찍 잔다. 우리집 식구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 댁 식구들은 그렇지가 않다.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술을 곁들인 저녁만찬을 좋아한다. 먹고 나면 9시가 넘는다. 나는 잘 밤에 너무 속이 거북하다. 이게 도무지 어렵다. 내가 예민해서겠지만 '이 집 식구들'과 '나'는 다르다.
전철을 갈아타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그는 ‘불평불만을 들었다’고 해석하는 토크. 나는 남자가 번 돈은 집을 마련한 대출금을 갚거나 저축을 하고 여자가 번 돈은 생활비로 쓰는 방식은 절대로 안한다, 생활비는 공동부담하고 저축이나 기타 다른 용도의 모음도 그리 해야 한다, 또 시댁과 처가와의 관계나 챙기는 것은 같게 한다. 이런 저런 것들.
‘너는 나의 미로이거니’라는 말은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에 인용된 ‘아리아드네 송가’ 니체의 말이다. 아리아드네와 디오니소스 편에 나왔다. 크레타섬의 정복군주 미노스왕의 탐욕은 포세이돈 신이 보내준 황소를 사유하게 한다. 왕은 이미 공직인데 사리사욕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더 많은 섬을 정복하기 위해 해외원정길에 나갔고, 그의 아내 파시파에는 숫소에 대한 욕정을 느낀다. 다이달로스가 만든 암소 안에 들어가 머리는 소, 아래는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스왕은 그 괴물의 존재에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왕비를 비난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왕은 장인 다이달로스에게 만들게한 미궁에 숨겨둔다. 이 괴물은 아테네로부터 살아있는 남자와 여자를 공물로 받아 먹이로 삼는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왕의 탐욕을 상징한다고 저자 구본형은 말한다. 어떤 책에서는 미노타우로스는 개인 안의 그림자, 아직 인식되지 않고 탐험되지 않는 자아의 어두운 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아리아드네는 미노타우로스에게 공물로 주어지던 아테네 선남선녀의 한 명으로 왔던 영웅 테세우스에게 실타래와 칼을 주어 그가 괴물을 죽이도록 돕는다. 아리아드네가 미노스왕의 딸이니 미노타우로스의 누이겠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버림받는다. 테세우스가 그녀를 크레타섬에서는 데리고 나갔지만 본국으로 동행하지는 않고 외딴 섬에 버렸다. 울고 있는 아리아드네를 구해 아내로 삼은 건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수스였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보통 미궁으로 들어갈 때의 실마리로서 비유된다. 테세우스는 실타래 끝을 입구에 묶어 놓고 실을 풀면서 들어가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다. 그리고 실타래를 다시 감으면서 입구를 찾아 되나올 수 있었다. 실타래가 없었다면 미궁에 갖혀 버릴 수도 있었을 거다.
결혼 또는 사랑은 웅덩이 또는 미궁이 맞는 것 같다. 퐁당 빠뜨린다. 무의식의 서랍을 열어제낀다.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를 책에서 배운 나로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너는 나의 미로이거니’라는 말은 나만의 것은 아닌 듯 하다. 상대 역시 나를 향해 그렇게 생각할 듯 하다. 나는 독특한 나의 반응과 관점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쏠쏠히 누리기를 소망한다. 그래도 기본 텍스트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실타래는 어디에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방식 말고 결혼 관련된 신화만 먼저 모아 볼까나? 뭐라고들 하셨는지. 인디언 전사들이 '죽기에 좋은 날이다' 외치면서 싸움터에 나갔듯이, 신혼이라 기억되는 지금이 이를테면 '결혼신화'를 읽기에 가장 좋은 날이 아니겠나?
연구원 2년차를 한 달 보냈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사부님을 생몰 연도를 함께 표기하는 저자로 조사하는 건 뭐랄까 이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이런 것도 허용이 될까?' 생각하게 하는 요인이다. 내가 무슨 뻘짓을 해도, 난리부르스에 각종 시행착오를 거듭해도 담담히 지켜보아 주는 눈길을 상정할 수 있었다. 지금은 허허롭다. 조셉 캠벨보다 먼저 그분의 신화책을 읽었다. 나는 신화 읽는 시간 동안 그가 행복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루 3시간 정도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듯 책을 읽고, 아침마다 일어나 새벽에 글을 2시간 정도 쓰면서 몰입과 황홀을 경험했다. 몰입과 황홀, 살아있는 느낌을 경험했으니 그건 그의 천복이었다. 그가 그러했음을 나는 행간 행간 고여있는 새벽푸른빛과 서늘하고 날카로운 아침 찬 물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룬 시칠리아 황소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 시칠리아를 제자들과 여행했다. 그건 내가 그 여행을 동행했기에 안다. 여행은 그가 책을 쓰는 방식 중 하나인 듯 하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나의 인생이다. 나의 심장도 새벽 읽고 쓰기에 들어있는 지, 그게 나의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탯줄이고 땅인지는 해 봐야 한다.
신화는 나의 첫 책의 주제다. 오리무중 암중모색. 첫 책으로 접근해 가는 과정 자체가 결혼만큼이나 나에게는 미궁이다. 첫 책에 대해서는 1년차에 들었던 사부님의 말씀이 실타래 일부가 되고 있다. 그 중 바짝 쥐고 있는 건 '1주 1책 1칼럼, 1일 1문장의 리듬을 놓치지 마라.' 다. 지난 주에 놓쳤었다. 그리고 5월에 9기 연구원과 함께 사부님의 책을 읽어가다 보면 내가 손에 쥔 실타래에 실을 더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이 많으면 멀리까지 갈 수 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실타래는 어떨 때 조곤조건 속삭인다. '즐길 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즐길 수 없을 때도 있을 거다. 아마 더 많을 거다. 삶은 그냥 흐르는 거다. 나무처럼 그냥 걸어가라. 계속 걷는 자 끝에 닿을 거다' 그렇다! 결혼이나 사랑은 모르겠지만, 첫 책 쓰기에 대해서는 내게는 실타래가 있다! 나는 실타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472 |
[5월 2주차] 지금 이 순간 ![]() | 라비나비 | 2013.05.13 | 2027 |
3471 | 9-2 마침내 별이 되다 (DS) [15] | 버닝덱 | 2013.05.13 | 2085 |
3470 |
5월 2주차 칼럼 -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려는 이유 ![]() | 유형선 | 2013.05.13 | 2161 |
3469 | #2. 필살기는 진지함이다. [8] | 쭌영 | 2013.05.13 | 2054 |
3468 | 떠날수 밖에 없는 이유 - (9기 최재용) [16] | jeiwai | 2013.05.11 | 2496 |
3467 | 산 life #3_노적봉 [6] | 서연 | 2013.05.09 | 2909 |
» | 2-4 너는 나의 미로 | 콩두 | 2013.05.08 | 2312 |
3465 | 가까운 죽음 [12] | 한정화 | 2013.05.07 | 2424 |
3464 | 산 life #2_마이너스의 손, 마이더스의 손 [1] | 서연 | 2013.05.07 | 2618 |
3463 | 저와 함께 춤추시겠어요 [6] | 한젤리타 | 2013.05.06 | 2199 |
3462 | (No.1-1) 명리,아이러니 수용 - 9기 서은경 [13] | tampopo | 2013.05.06 | 2037 |
3461 |
[5월 1주차] 사부님과의 추억 ![]() | 라비나비 | 2013.05.06 | 2362 |
3460 |
연 날리기 (5월 1주차 칼럼, 9기 유형선) ![]() | 유형선 | 2013.05.06 | 2276 |
3459 | 나는 하루살이 [14] | 오미경 | 2013.05.06 | 2188 |
3458 | Climbing - 6. 오름에도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1] | 書元 | 2013.05.05 | 1994 |
3457 | #1. 변화의 방향 [7] | 쭌영 | 2013.05.05 | 2090 |
3456 | 9-1 마흔 세살, 나의 하루를 그리다(DS) [7] | 버닝덱 | 2013.05.04 | 2172 |
3455 |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9기 최재용) [19] | jeiwai | 2013.05.04 | 2098 |
3454 |
시칠리아 미칠리아 - 소설 전체 ![]() | 레몬 | 2013.05.01 | 2217 |
3453 | 시칠리아 미칠리아 - 몬스터 (수정) [2] | 레몬 | 2013.05.01 | 2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