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주
- 조회 수 2368
- 댓글 수 2
- 추천 수 0
칼럼. 두 친구 그 후 - 감동의 반성문
나는 소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성장할 수 있게 키우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학교로 돌아와 순종이가 쓰러진 덕분에 교탁위에 경황없이 놓고 나온 성준이의 반성문을 챙기러 교실로 갔다. 다른 아이들이 장난삼아 돌려 읽거나 해서 제 자리에 없을까 걱정했었는데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순종이가 쓰러졌다고 다른 반 아이가 달려와 외치기 전에 성준이 반성문을 보고 감동받아 몇 자 적어줘야지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마무리를 못했다. 다시 펜을 들어 ‘성준아! 너의 각오어린 반성문을 보니 너무 감격스럽다. 네가 목표한 것처럼 앞으로 더욱 멋진 모습 기대할 께.’라고 적고 성준이에게 돌려주었다.
성준이는 2학년 겨울방학부터 순종이의 절친이 되었다. 성준이는 성적이 앞에서 상위권이고 순종이는 뒤에서 상위권이라 언뜻 보기에 둘은 같은 과가 아니다. 작년까지 성준이를 알던 선생님들이 두 녀석이 절친이 되었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성준이가 원래 멋부리는 것을 좋아하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안타까워하신다. 요즘 골초에 무단지각, 무단조퇴, 무단결석을 밥 먹듯이 하는 상황을 상상도 못했다는 여론이 다수이다. 무엇이 겨울사이 그들을 그토록 친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자신의 부모로 시작한 어른들에 대한 반항심이 둘을 한 배를 탄 동지로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성준이의 꿈은 자기 아빠와 같지 않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고, 꿈이 없다는 순종이의 유일한 바램은 엄마가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올 초 3학년이 되기 전에 시작된 둘의 우정은 함께 학교에 지각하고 함께 담배를 피우고 함께 학교를 벗어나 놀러 다니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둘은 교내외 흡연, 상습도박 등의 같은 이유로 선도위원회에서 징계처분을 받고 2주간 생활지도를 받는 것까지 한 배를 탔다. 그래서 둘은 아침마다 다른 아이들보다 30분 일찍 등교해서 청소봉사를 하고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와서 독서를 하고 방과후에 청소봉사를 하고 반성문을 쓰는 일과를 1주일이 넘게 보내고 있었다.
성준이가 생활지도를 받은 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성준이가 너무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싸인을 해달라며 반성문을 내밀었다. 반성문을 보여주며 저렇게 기쁜 표정이라니 ‘뭐지?’하는 생각이 들어 빽빽한 글씨로 한바닥을 가득 채운 글을 읽기 시작했다.
“ 생활지도 권샘이 특별히 나를 마지막으로 빼주셨다. 이것은 마지막 반성문이다. 쓰기 정말 싫었는데 마지막이라니 너무 쓰고 싶다. 이것을 끝으로 난 이제 학교봉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 살면서 이렇게 기쁜 적은 몇 안 되는 것 같다. 오늘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도 하고 마지막이니까 더 열심히 했다. 이제 아픈 금연침도 안 맞아도 되지만 금연은 꼭 할 것이다. 어차피 금연할 목적이었으니까.
……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오늘로 끝이다. 순종이가 같은 배를 탔으니 끝까지 같이 하자고 꼬시지만 난 절대로 같이할 마음은 없다. 왜냐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그러니까 같이 한다는 말을 했어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 내가 열심히 해서 특별히 해제를 시켜주셨는데 계속 하겠다하면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 오늘 부모님에게 전화로 징계가 끝났다고 말했는데 난 정말 성실히 해서 일찍 끝내주셨다고 하니 오히려 꾸중만 들었다.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그렇게 꾸중을 들어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가 저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이라며 웃으시고 저럴 땐 정상처럼 보인다고 그러셨다. 항상 집에 들어갈 땐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바로 자곤 했는데, 웃으며 집에 오니 할머니 기분이 좋으셨나보다. 부모님과 가족에게 약속했듯이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꺼라 했다. …… 금연침은 계속 맞으러 가야겠다. 이왕 끊을 꺼 확실하게 끊고 싶으니까. 그래서 부모님에게도 만약에 내가 금연을 못해서 담배를 또 피게 된다면 그때는 호적에서 파버리고 인연을 끊어도 좋다고 했다.
이번 징계로 참 많은 것을 깨달았고 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싶다.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시험공부나 열심히 해야겠다. 이거도 시험공부를 다하고 쓰는 것이다. 졸려야 하는데 졸리지가 않다. 너무나도 기쁜 것 같다.
친구들이 불쌍하다 10일 동안 아침에 일찍 일어나 8시까지 등교하는 게 힘든 것을 알기에 더욱 불쌍해진다. 난 이제 끝인데, 순종이와 다윗이와 성근이에게 미안하다. 그러니까 성실하게 좀 하지 그랬냐. …… 다른 애들도 빨리 징계를 받아서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으면 좋겠다. 밤마다 징계 받는 아이들이 늘어나길 기도하고 있다. 나는 이제 걸릴 일이 없으니 너무 기쁘다. ……“
교직 생활 10년 만에 이런 감동과 재미를 한 번에 준 반성문을 처음이다. ㅋㅋ 읽는 내내 어찌나 웃음이 나고 성준이가 대견하던지. 순종이가 꼬셔도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와 성실함 덕분에 아직 남은 생활지도를 면제 받았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있는 글을 읽는 데 내가 더 얼마나 기쁘던지. 특히 밤마다 징계 받는 아이들이 늘어나길 기도하는 말에 빵 터졌다. 애는 애다. 사실 담배 피우는 애들 중에 이번에 징계를 받은 애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러니 생활지도를 받으면서도 어린 마음에 좀 억울했을 것이다. ㅎㅎ
생활지도 담당 선생님이 순종이가 그리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안 뒤로 ‘성준이가 일찍 생활지도를 마치니까 그게 배가 아파서 심리적인 요인으로 순종이가 아프게 된 것이 아닐까 싶네요.’ 하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사실 나도 정황상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순종이가 아파서 쓰러진 날은 성준이가 징계를 면제받은 첫날이었다. 매일 성준이와 같이 받던 아침 청소봉사를 혼자하려니 정말 심사가 뒤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제는 성준이가 함께 담배도 피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더욱 마음이 불편했을 터이다.
엊그제 종례를 마치고 청소당번 B조에게 청소를 하라고 하는데 대뜸 성준이가 빗자루를 들고 맨 앞으로 나왔다. 난 순간 의아해서 성준이에게 “웬 일이야?”라고 물었다. 성준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저 교실청소 청소잖아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학기 초 순종이가 집에서도 청소 같은 거 해본 적이 없어서 교실청소하기 싫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때 옆에서 자기도 청소하기 싫다며 뻣대던 녀석인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청소를 하겠다고 남다니 이건 기적이다. 그래, 맞다!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청소하기 싫다고 녀석들만 빼줄 수가 없어서 도망을 칠 때 치더라도 청소구역을 정해주었던 기억이 그제야 난다. 성준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애써 청소를 하고 가라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먼저 남는 법이 없던 녀석이 함박웃음을 지으면 먼저 청소를 하겠다고 빗자루를 들고 나서다니 생활지도를 받은 10일간의 깨달음이 정말 대단한 모양이다. 성준이에게 “점점 멋져지는데 훌륭하다!”라는 말을 하니 웃으며 청소를 시작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392 | 정선가는 길은 멀었다. [2] | 신진철 | 2011.05.11 | 3005 |
2391 | [호랑이 실험 12- 4장 실험 분석 및 정리] [1] | 수희향 | 2011.05.11 | 1950 |
2390 | 원하는 것을, 드립다 파면 성공할까? 그 이야기다. [6] | 달팽이크림 | 2011.05.10 | 2705 |
2389 | 결혼 10년차 섹슈얼리티 [10] | 선 | 2011.05.10 | 2127 |
2388 |
[02] 어머니의 기억 ![]() | 최우성 | 2011.05.10 | 2527 |
2387 | 길을 나섰다. [6] | 신진철 | 2011.05.10 | 2016 |
» | 칼럼. 두 친구 그 후 - 감동의 반성문 [2] | 연주 | 2011.05.10 | 2368 |
2385 | 하루의 즐거움을 위해 망설이지 않기 [14] | 이은주 | 2011.05.09 | 2032 |
2384 | 06-02. 나비효과 [6] | 미나 | 2011.05.09 | 2046 |
2383 | 삼대유사(三代有事) [11] | 루미 | 2011.05.09 | 2110 |
2382 |
Pilgrim Soul-누군가의 첫 새벽이 되어 ![]() | 사샤 | 2011.05.09 | 3233 |
2381 | 6. 마음에서 힘빼기 [12] | 미선 | 2011.05.09 | 2351 |
2380 | 06. 아름다운 그녀, 문희의 이야기 [8] | 미나 | 2011.05.08 | 2293 |
2379 | [평범한 영웅 006] 박박에겐 없고, 부득에겐 있는 것 [8] | 김경인 | 2011.05.08 | 4724 |
2378 |
[양갱5] 내가 쓴 삼국유사_보원사와 마애삼존불 ![]() | 양경수 | 2011.05.08 | 3512 |
2377 | 라뽀(rapport) 50 - 맨땅에 헤딩의 동반자 | 書元 | 2011.05.08 | 1998 |
2376 |
단상(斷想) 63 - 뜨거운 봄 ![]() | 書元 | 2011.05.08 | 1991 |
2375 | [늑대6] 내 마음의 모사꾼 [18] | 강훈 | 2011.05.08 | 2268 |
2374 | 나비No.6 - 아비 수달의 마음 [12] | 유재경 | 2011.05.07 | 4100 |
2373 |
푸루잔 스토리 -5 ![]() | 홍현웅 | 2011.05.07 | 23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