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 조회 수 2298
- 댓글 수 2
- 추천 수 0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가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낮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곱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곱터들이
고라니와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문정희
3 몬스터
"여기 지금 에트나산이야."
[그래? 좋아?]
"응, 생각보다 엄청. 그런데 춥다."
수화기 뒷편의 목소리가 웃는다. 아직 새벽녘이라 졸린지 잠이 묻어난다. 서울에 있는 남자의 목소리… 3000미터 고도에서 들으니 더욱 애틋하다.
[보고 싶어.]
"안 그래도 생각 많이 하고 있어."
[언제 와?]
"곧…. 아직 여행 중반도 못갔는데 벌써 보채기야?“
[얼른 와.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번엔 내가 소리내어 웃는다. "괜찮아… 난 안죽어." 마치 아이를 달래기라도 하듯이 그에게 힘주어 말한다. 에트나산은 활화산으로 작년에도 어김없이 이 산은 생존 신고를 했었다. 고도의 서늘한 기운이 열감으로 뒤바뀌고 우중충한 하늘은 아예 검은 색으로 칠해지는 장관…! 매캐한 황산 냄새와 함께 커다랗게 울리는 불카누스의 고함 소리… 그렇게 화산이 울면 많은 사람이 죽겠지.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로 생겨난 땅에는 노오란 꽃이 엉금엉금 기어서 피어날 것이다. 한 번쯤은 그런 장관을 구경하고 싶다. 죽음을 무릎쓰고 감행하는 모험…! 나는 그 경계선을 흠모하였다. 검고 흰 이 산의 능선처럼 삶과 경계에 한발씩 발을 담그고 정상으로 오르다… 그 마지막 순간에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너란 말이지. 그래서 지금 너에게 이처럼 전화를 하는 중이고… 전화가 터지지 않는 해발 3000미터에서 빨간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이 기막힌 부조화가 감사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운 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혹시 나는 죽게 될까?
아니다. 오늘 죽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저 무덤덤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꼭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아. 말이라는 것이 꼭 그러하다. 예언들은 말이 되어 세상에 내뱉어지는 순간 과녁을 빗나가곤 한다. 30년차 경력의 증권회사 브로커에게는 치명적인 진리다. 예언을 경계하라. 특히 에트나산 같이 영험한 장소에서는. 그래서였을까? 나는 친구들과 함께 에트나를 떠나며 작별을 고했었다. 다시는 오지 못할 이 산을 영원히 내 눈에 담아두고자 했었다. 안녕, 에트나! 내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 그러므로 이 찰나의 경험으로 내 몸을 온전히 적시리라. 그렇게 한 모금의 물을 목 뒤에 부었다. 시원했다. 영혼이 척수에서 빠져 나와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감상 앞에 예언은 보란듯이 빗나갔다. 에트나산은 나를 이틀 만에 다시 소환하고야 말았다. 나래가 사라진 이후, 그녀를 찾기 위해 나는 이 활화산에서 다시 한 번 더 죽음의 경계를 시험해야 했다.
“그거 아세요? 에트나산에는 괴물이 살고 있답니다. 불의 신 불카누스의 작업장이기도 하고, 티폰 신이 갖힌 산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폴리페모스가 살고 있는 산이기도 하죠."
버스의 내 옆에 앉은 남자는 계속 친근하게 말을 해댔다. 아마도 대학의 인문학도쯤 되는 것 같다. 아까 물을 조금 건네 주고 나래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고 몇 번 말을 건넨 것이 일이 커졌다. 이 매부리코의 통통한 백인 남성은 지나친 수다쟁이다. 나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었다. 그리곤 이틀 전에 보았던 산의 풍경을 별다른 감흥 없이 쳐다보았다. 곳곳에 불을 놓아 까맣게 타 들어간 밭이 이어졌다. 그 밀을 베어내고 밀집을 싼 포장재의 둥근 원기둥들은 농촌에서 보던 벼농사의 흔적과 같다. 밀을 밀어낸 노란 밀밭, 곳곳에 서 있는 올리브나무, 선인장이 모자이크같이 조화를 이루는 능선을 돌아 돌아 에트나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케이블카에서 내려 산악지프로 갈아탔다. 나래가 나와 같은 경로를 따랐을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다시 해발 3000미터에 올랐다. 무리의 가이드들은 다시 똑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산은 작년에도 터진 적이 있는 활화산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약250만년 전에 화산활동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사상 200번 넘게 폭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분화의 기록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은 BC693년 에트나화산의 분화이다. 높이는 유동적이다.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고도가 일정치 않은 탓이다. 산기슭의 둘레는 160KM. 바닥면적은 1,190km2에 이른다. 점성이 낮은 현무암질 용암을 분출하고 있다. 화산이 분출해낸 칼륨(K). 인(P)같은 물질들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 화산은 매력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전세계 인구의 10%정도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활화산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관광객들을 다시 한 번 주욱 스캔한다. 아무리 봐도 동양인은 나 하나 뿐인 것 같다. 사방이 검고 붉다. 전에 왔을 때도 일행 중 세 명이 산에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죽기 전에 책을 한 권 꼭 써야 한다는 분과 산에 올라봐야 화산재밖에 더 먹겠느냐고 이야기하던 친구다. 이 친구를 생각해보니 죽음의 경계를 몇 번 넘나들었던 경험 때문에 내재된 두려움의 잔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머지 한 명이 바로 나래였다. 산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쇼핑에 관심이 많다. 내려올 산을 올라가는 것. 지근거리 (至近距離) 로 다가가는 사람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사람의 차이이다. 바라보기는 매 한가지다. 거리의 경제학에서는 가까울수록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그만큼의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안전한 거리에 있던 나래가 사라지다니… 지금 우리는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리스크는 확률일 뿐 실체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에트나를 겁없이 오른다.
나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구릉에서 배낭을 주섬주섬 뒤졌다. 와인 한 병! 조금 망설이다가 꺼내들었다. 전에 사부도 이 즈음에서 와인을 한 병 꺼냈었다. 곤란해하는 가이드의 말을 듣지 않고 묵묵히 와인을 한 병 깐 것이다. 우리는 너나 나나 컵을 들이밀었다. 마치 예수의 피를 받는 구도자들처럼. 아이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디누 리파티가 연주한 쇼팽의 왈츠였다. 화산의 산등성이가 어느 새 파티장으로 변했다. 즐거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디누 리파티의 마지막 앨범 [최후의 연주회]. 그는 이 앨범을 녹음할 때 백혈병의 일종인 호지킨병으로 투병하고 있었다. 힘들게 한 곡 한 곡을 연주했지만 결국 마지막 왈츠 한 곡은 연주하지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기립박수를 쳤다. 2개월 뒤 그는 33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죽음을 앞에 둔 연주자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의 연주는 완벽하고 냉정하다. 우리가 생을 담보로 오른 산에서 와인을 마시며 생을 찬미하는 동안 쇼팽의 왈츠 중 “고별(Farewell)”이 연주된 것은 조물주의 짓궂은 장난이었을까? 만약 화산이라도 터졌더라면 가슴 서늘한 암시가 될 뻔했다. 어쩌지, 우리는 어떻게 될까? 예전에 읽었던 쪽글 하나가 또 떠오른다. [그는 사고로 낭떠러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손의 손가락이 그의 무게와 삶을 지탱하는 모든 끈이었다. 간담이 서늘했다.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흥미를 느꼈다. 궁금해졌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 ]
다시 와인을 목을 꺾어 마신다. 등산용 스탠레스컵이 입술에 전율하듯 부딪친다. 시칠리아 와인은 우아하기 보다는 맹렬하다. 유황가스의 꼬리를 바라보며 술잔을 턱 위로 젖히는데 감긴 눈으로 태양빛이 강렬하게 쪼아 내렸다. 입 안으로 퍼지는 비릿한 와인맛이 퍼진다. 마치 피맛 같았다. 황홀했다. 태양과 피와 불의 활화산! 내가 영원의 시간처럼 감긴 눈으로 햇빛을 음미한다. 강렬한 생명이 뇌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떴을 때, 머리에 왕관처럼 햇빛의 아우라를 둘러쓴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다. 아마도 나에게 볼 일이 있는 모양이다. 가벼운 녹색 점퍼에 옅은 턱수염, 산뜻한 푸른 눈동자.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남자는 가만히 내가 입에서 컵을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
나는 말 없이 와인병을 찰랑 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얄팍한 배낭에서 스텐레스 컵 하나를 꺼낸다.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남자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같은 각도에서 술을 마신다. 나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본다.
"멋진 생각인데요, 에트나에서 와인 한 잔이라니?"
"제 사부가 가르쳐 준 거예요."
"오?"
"전 서연이라고 합니다."
"필립입니다."
나는 필립과 악수를 나눴다. 해발 3천미터는 오히려 서늘하다. 불구덩이의 심장으로 다가갈수록 몸은 오히려 차가워진다는 아이러니. 살의를 띈 마음이 오히려 냉정해지는 것처럼 불과 얼음이 공존한다. 산보다 더 아래쪽 하늘에 하얀 달이 그림자처럼 걸려있다. 하늘 위의 산에 있는 셈이다. 민둥산의 산등성이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연극 세트장처럼 온통 하얀색이다. 아마 밤에는 온통 검은색일 것이다. 무릎께에 걸리는 달을 보며 어둠 속의 에트나에 고립된다면 마치 우주 어느 행성에 있는 듯이 여겨지겠지. 정말 굉장할 것이다.
나는 필립과 와인을 바닥까지 훑어내었다. 취기 속에 장난이 오고 갔다. 앉은 자리의 흙이 따뜻하다. 흙을 파내어 만졌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파내어 쥐어든 타라의 흙처럼 검고 뜨거웠다. 마치 유기체의 체온을 느낀 듯이 온기는 전율이 되어 내 몸을 흘렀다. 이 산은 아직 살아 있다. 나는 필립에게 말했다. "주변이 조용한 날에는 이 산이 우웅 –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대요." 그 말을 듣고 필립은 산을 올려다 보았다. 유황 가스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산꼭대기. 그리고 녹색의 산등성이. 왠지 산이 빙긋 웃고 있는 것 같다. 필립도 알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지금도 들리는 것 같군요."
그리고 그 순간, 화산이 폭발하였다.
고막의 찢어짐이 먼저였을까? 나는 지진 같은 몸의 흔들림을 느끼고 앉은 자리에서 쓰러졌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메꾸더니 포물선을 그려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매캐한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게 바로 지옥의 냄새구나. 땅에 짚은 손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생각하였다.
이제 죽는건가?
"이리로 와요!"
필립은 얼른 내 팔목을 낚아챈 후 달리기 시작했다. 우린 능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이 뛰어야 했다. 멀린 짚차들이 보였다. 갈 수 있을까? 화산재들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폭발음이 다시 몇 차례 들리더니 덩어리들이 바위처럼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에 눈물이 흐르지만 눈을 감으면 안 된다. 눈 앞에서 수신호로 다급함을 말하는 몇 몇 사람들이 보였다. 차량이 화산재에 묻히는 것이 보였다. 일부는 떠났고 일부는 사람과 함께 묻혀버렸다.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필립이 몸을 돌렸다.
"다른 쪽으로 가야 해요!"
에트나를 오르며 이 산이 터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아서 더 살아야 하니까 에트나산은 오르지 않겠어요. 그러나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해주자면, 만약 에트나산이 폭발했을 때에는 당황하지 말고 까치발로 뜀뛰기를 하듯이 차근차근 하산하면 되요.” 나는 그의 두려움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것이 과연 생을 사랑해서인지 관성을 사랑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의 경계에 가보지 않고 어떻게 생을 논할 수 있나? 마치 어둠 없이 빛을 논하는 화가처럼. 하얀 캔버스. 눈부시게 무료하다.
"조금만 더 가면 안전해요! 어서요!"
필립이 내 손을 끌었다. 둘은 어느 새 검은 빛이 되었다. 아직 용암은 우리들 근처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시속 150m로 진행한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조금은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산등성이를 벗어나자 오히려 집들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차도 없이 어떻게 3000미터를 내려갈 것인가? 방금의 살육의 현장을 바라본 충격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울고 있을까? 살아난 다행감으로? 아니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필립은 말 없이 자신의 소매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아요… 자…" 그리고 따뜻하게 등을 감싸 안았다. 그제서야 어깨가 내려앉았다. 나는 남자의 어깨에 한 동안 무게를 기대었다.
우리는 천미터 즈음을 내려갔다. 헬리콥터들이 오고 갔지만 우리의 수신호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화산 용암은 산의 반대편으로 흐르는 듯했다. 다행한 일일까? 밤이 될 무렵, 우리는 겨우 비어있는 별장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층 높이이니 설사 용암이 흘러내린다 하더라도 조금은 버텨 주겠지. 우리는 윗층으로 올라갔다. 전화를 시도해보았으나 끊겨 있었다. 다행히 따뜻한 물이 나왔다. 먼저 씻은 후, 필립이 마저 들어갔다. 그 사이 서랍장에서 옷가지를 뒤지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가만히 어깨를 흔드는 손에 겨우 눈을 떴다. 필립이었다.
"수염을 깎았네요?"
"네… 더러워져서요. 괜찮아요?"
"아, 깜박 잠이 들었었나봐요."
"이리 와서 자요. 일층에서 매트를 끌어 왔어요."
필립은 말릴 새도 없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상당히 키가 크다. 남자의 손의 긴장하기에는 지나치게 몸이 피곤하였다. 나는 무례를 무릎 쓰고 내 무게를 온전히 그의 팔에 실었다.
"안졸려요?"
"네 당장은… 필립도 자아죠?"
"괜찮아요. 배고플텐데 좀 먹어요. 부엌에서 찾았어요."
필립은 과일과 포도주, 그리고 말린 빵덩어리 등을 바닥에 내놓았다. 전기가 나간 모양인지 촛불 몇 개를 켜두었다. 필립의 벗은 윗몸에 여기 저기 그을리고 베인 상처가 불빛을 따라 일어났다 사그라 들었다. 내가 누운 자리에서 슬쩍 사과에 손을 가져가자 그것을 뺏어 들고는 솜씨 좋게 깎기 시작한다. 인대가 보기 좋게 튀어나온 남자의 큰 손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필립은 나에게 곁눈질을 보내더니 빙긋 웃는다. 참으로 좋은 미소다.
“와... 화산이 터지다니...”
“...그러게요.”
“지져스...”
필립은 깎은 과일을 나에게 내밀고 자신은 다른 날 것을 한 입 베어물었다. 사과 과육의 향내가 났다. 순간 배가 고파졌다. 마치 태어나 처음 먹는 과일 같았다.
“이걸 다시는 못 먹어 볼 뻔했네요.”
“좀 퍼석하네요.”
“용암이 내려오는 걸 망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까짓것, 또 덮쳐오면 그냥 죽죠 뭐.”
“내가 망을 볼게요. 필립은 좀 쉬어요.”
“아뇨, 내가 하죠.”
필립은 사과를 입에 문 채 일어났다. 어쩐지 그에게 유도된 부탁을 한 듯하여 미안하였다. 조금 있다 턴을 바꿔주지 뭐. 나는 매트에 최대한 정바른 자세로 누웠다. 아직 황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니 삼나무 냄샌가? 적막이 공기 중을 떠다녔다. 불안하다. 혹시 내가 잠든 사이 필립이 혼자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그에겐 밤중이라도 산을 내려갈 여력이 있다. 어쩌면... 나는 둥글게 허리를 말아 일어났다. 누워도 눈이 감기지 않을 바에야 산이라도 보고 있는 게 나았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필립을 찾았다.
“필립!”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내려와요. 어서!”
나는 긴장을 감춘 채 부탁했다. 시야는 어두웠다. 멀리 산맥의 살을 따라 용암 줄기가 네온처럼 빛났다. 필립은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베란다 난간은 그의 발 사이즈보다도 폭이 좁아 보였다.
“밤바람이 시원하네요. 한 대 줄까요? 아까 침대 스툴에서 찾았어요.”
“난 담배 안 펴요.”
“이런 경치엔 담배 한 대는 펴줘야죠. 불타는 로마여, 내 시가에 불을 붙여다오! 네로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하긴 거기서 떨어져 죽을 거라면 폐암 걱정은 안해도 되겠네요.”
“이 높이에선 못죽어요.”
“아래 철창이 있어요.”
필립은 내 말에 곁눈으로 나를 보며 더 깊은 한 모금을 빨았다. 멀리서도 눈동자의 푸른빛이 느껴졌다.
“마치 당신은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군요.”
“그 반대죠.”
“용암은 멀리 있어요.”
“용암의 표면은 검으니까 다가와도 눈치채기 힘들 수 있어요. 순식간에 문턱에 와있을 수도 있고...”
“안 그래요, 안 그래. 뚜껑은 원래 열릴 때만 소리가 큰 거예요. 정작 내용물은 다 시시하기만 하고...”
“혹시... 남의 말은 무조건 안듣는 타입이예요?”
“왜요?”
“아니 계속 거기서 안 내려 올건가 해서...”
“아... 진짜 재미없게 사시네. 이 정도 위험도 감수 못해요?”
“... ...”
“왜 웃어요?”
내 표정의 이유를 물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숙인 고개를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생각했다. 글쎄, 나는 왜 웃었을까?
“웃는 게 예쁘네요.”
필립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웃기를 멈췄다. 남자는 두 팔을 파자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양쪽 골반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나는 시선을 반사적으로 피했다.
“아까 산에서 와인병 깔 때 멋있었어요.”
“아, 우리 사부한테서 배운 거예요. 그리고, 아직 그 [산]이구요.”
“사부? 센세? 정확히 한국에서 하는 일이 뭐예요?”
“증권쟁이.”
“오, 큰 돈! 당신 왠지 큰 돈이 어울려.”
“...흥.”
“아아아— 이제야 이해되네. 위험, 그렇지 위험... 하하!”
“정말 안내려와요?”
“당신, 기죽이게 위험한 여자야...”
“마음대로 해요, 그럼.”
나는 흘러내린 아크릴 담요를 다시 어깨에 걸치곤 등을 돌렸다. “헤이! 가지 마요...” 필립은 중지와 엄지를 튕겨 딱 - 소리를 냈다. 나는 겨우 한숨을 참았다. 아직 애로군.
“뭐, 어쩌라구?”
“아직 결정 못했어요. 내려갈지 말지...”
“그래서요?”
“...에트나요, 에트나.”
“음?”
“에트나를 내려갈지를 결정 못했다구요, 나는.”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남자의 셔츠가 어둠의 방향으로 나부꼈다.
“무슨 소리예요?”
“...이 산이 너어무 마음에 들어서 못내려가겠다구요.”
“허튼 소리 말고, 왜 그러는 거지?”
“...멋지잖아요. 사실. 이런 기회가 없다니깐. 활화산이라니!”
“죽고 싶어서 그래요? 진짜로?”
“와이 낫? 이 산은 최고의 무덤이 될 수 있어요!”
“아까 살아나온 걸 후회하는 거예요, 지금?”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필립은 감탄사 같은 얕은 숨을 내쉬며 간혹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마치 ‘정말 그렇지 않느냐?’고 동조를 구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눈동자를 따라 빛이 뱅그르 돌았다. 그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상기되었다. 그는 내 표정을 관찰하고 있으리라. 내 볼은 돌가루를 맞은 듯이 내려앉았다. 우리 둘은 달에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붕 떠오를 태세였고 나는 숨쉬기가 힘들었다.
“마음을 정했어요.”
“... ...”
“난 여기 남을게요. 미안하지만, 당신 혼자 내려가요.”
필립은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는 아직 화산재가 묻어있는 녹색 점퍼를 툭 털어 입었다. 탄 내가 먼지처럼 풍겼다.
“같이 하산해주지 못해 미안해요.”
“진심이군요?”
필립은 웃었다. 황홀한 미소에 정신이 아찔했다. 말려야 하나? 아니, 그에겐 선택할 권리가 있어. 그렇지만 왜?
“어떻게 죽을 건가요?”
“용암을 찾아야겠죠.”
“지옥불에 빠지겠다구요?”
필립은 시가를 붉게 빨았다. 세 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는 듯 했다.
“그래요, 궁금하네요.”
그는 떠났다.
나는 우두커니 남겨졌다. 마치 두 번 살아남은 것 같았다. 죄책감의 칼날이 나를 반대 방향으로 베고 갔다. 적어도 그는 확신은 있어보였다. 나는 신이건 인간이건 간에 의지를 가진 자들의 여집합이었다. 그것은 내가 원한 바가 결코 아니었다. 오기가 생겼다. 나는 내려놓았던 그대로 배낭을 다시 맸다. 밤길은 화산의 불꽃으로 환했다. 달그림자가 밤숲에 웅성이는 짐승들을 낳았다. 다시는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하겠지. 멀리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고 나는 이름을 불렀다.
“필립!”
남자가 뒤돌아섰다. 화면이 천천히 흘렀다. 그의 얼굴이 보이고 그제서야 나는 숨이 턱에 닿는 것을 느꼈다. 허리가 꼬그라졌다.
“좇아왔어요?”
“네, 같이 가요.”
“무슨 의미죠?”
그래 무슨 의미지? 나는 천천히 윗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무얼 하고 싶은걸까? 불길했다.
“같이 가줄게요. 방해하진 않겠어요 단지,”
“단지?”
“뭐가됐든 같이 있어주고 싶어요.”
“... ...”
필립은 고민하고 있었다. 최후의 고독이 방해받길 원하지 않는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라는 말이 지나치게 쉬운 상황이다. 지금은... 나는 우겨야 할까? 아니면...
“좋아요.”
“... ...”
“대신 정말 방해해선 안돼요.”
“...그러죠.”
“짐에 뭐가 들었죠?”
아아... 나는 배낭을 겨우 떠올렸다.
“내려왔던 짐 그대로예요.”
나는 스위스 군용 나이프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말하지 않았다.
“와인도 있나요?”
“조금, 남았어요.”
“잘됐네요.”
필립은 더 이상 시가를 피우고 있지 않았다.
“가죠.”
그의 말에 나는 안도했다.
“이 산엔 괴물이 살고 있대요.”
용암의 꼬리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두려움과 설렘에 지쳐갈 무렵, 필립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어렸다.
“어떤 괴물이요?”
“여자들을 홀려서 잡아먹는 괴물이요. 이런 붉은 달밤이면 여자들을 미치게 만들어서 자살하게 하는 거죠. 그러면 괴물은 벼랑 끝에서 여자의 떨어지는 몸을 낼름 잡아먹어요.”
“그런 게 어딨어요?”
“있어요, 진짜!”
필립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겨댔다.
“에트나산엔 불카누스가 있죠. 아니면 티폰 신이나... 필립이 말한 그런 괴물은 족보도 없는 괴물이예요.”
“불카누스? 아아... 헤파이토스를 말하는 거죠?”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는 얼굴이 못생기고 절름발이였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바람둥이 제우스와 본처인 헤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이 서자들에 비해 모두 함량미달인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가 절름발이인 이유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선천적인 이유인데 헤라가 자신이 낳은 아이가 장애와 흉측한 외모를 가진 것을 보고 올림포스 산에서 그를 던져버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우스의 바람기에 화가 난 헤라가 제우스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헤파이스투스가 어머니 헤라의 편을 들자 화가 난 제우스가 그를 걷어차서 렘노스 섬으로 추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고로 다리는 불구가 되고 얼굴은 다쳐서 추해졌다. 그의 뛰어난 손재주로 다리를 만들어 붙였지만 절름발이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신의 손재주를 이용해 신들의 화려한 장비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모자와 샌들.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아가멤논의 지휘봉, 아릴레우스의 갑옷, 헤라클레스의 청동 딱따기, 헬리오스의 전차, 에로스의 활과 화살, 제우스의 번개 등이 그의 작품이다. 또한 신들이 인간에게 선물로 준 최초의 여자 판도라와 그녀의 항아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심한 두통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의 출생을 도운 것도 그이다. 신화는 애트나가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투스의 작업장이라고 한다.
신들 중에 제일 못생긴 헤파이스토스가 가장 아름다운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맞게 된 연유는 올림포스 신들이 티탄족과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제우스는 티탄족을 무찌를 수 있게 해주는 자에게 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헤파이스토스는 번개를 만들어 제우스에게 바침으로 티탄족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제우스는 그에 대한 대가로 헤파이스토스에게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맞게 해준다. 그러나 그는 대장간 일을 핑개로 아프로디테와 함께 하지 않고 아프로디테는 못생긴 남편을 두고 미남인 아레스(전쟁의 신)와 밀회를 즐긴다. 아레스도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다. 그는 얼굴은 미남이었으나 성격이 좋지 않아 동료신들과 부모도 싫어하는 신이었다.
한편 헤파이스토스는 트로이전쟁 때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대장간을 찾아온 아테나에게 반한다. 그녀는 얼굴은 못생기고 장애가 있었지만 아레스와 달리 마음씨가 따뜻한 헤파이스토스에게 반하여 결혼을 하고 아들 4명을 낳는다.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이 된 에릭토니우스는 그들의 아들 중 한 명이다. 아버지를 닮아 다리가 불편하였지만 손재주를 물려받아 네 마리 말이 끄는 이륜차를 발명하였다 한다.
신중의 신인 제우스의 적자들이 함량미달인 것, 신들 중에 제일 못생긴 헤파이스토스가 가장 아름다운 미의 신 아프로디테를 부인으로 맞은 것, 그런 부인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남자,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테나가 헤파이스토스와 사랑을 하게 되는 것, 아이러니한 것이 삶인가 보다.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인간의 이야기가 신화이니 말이다.
“전 사실... 연극을 많이 해왔는데 헤파이토스 역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해봤어요.”
필립은 엄지와 검지 사이로 턱을 괴었다.
“주로 어떤 역할을 했는데요?”
“글쎄요, 지루한 역할들이죠. 현대극을 하니까... <세일즈맨의 죽음>이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그 영화 좋아했었는데. 욕망...”
“아아, 문학도들이 의례 거쳐가는 연극이죠.”
“말론 브란도 역할이었겠어요?”
필립은 옆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학에는 잘생긴 청년들이 많아요.”
“그래서 무슨 역할이었는데요?”
“말론 브란도 역이요. 제 안에 없던 거라 힘들었어요.”
“당신 안에는 뭐가 있는데요?”
“글쎄요... 어쩌면 헤파이스토스가 있을지도요.”
“어째서?”
“제 현실 인식과 비슷해요. 전 WASP(와이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 출신의 망나니거든요.”
“헤파이토스가 망나니는 아닌데?”
“그럼 그도 아니네요.”
필립은 멋쩍게 웃었다.
“또 다른 이야기 해줘요. 재밌어요!”
“마치 세헤라자데가 된 기분이네...”
“왜 아까 있었잖아요. 다른 괴물 이야기, 티파티인가 포켓몬인가...”
“티폰 – 이요.”
티폰은 강하고 무서우며 거대하다. 영어의 태풍(Typhoon)의 어원이다. 머리에서 허벅지까지는 인간이었지만 머리대신에 100개의 용의 머리와 눈에서 번갯불과 불꽃을 내뿜을 수 있고, 대퇴부에서는 아래로 똬리를 튼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온몸을 뒤덥고 있는 깃털과 날개는 항상 그 자신이 일으키는 격렬한 폭풍 때문에 휘날리고 있다. 그의 어깨는 하늘에 닿고 100개의 머리는 별에 닿으며 두 팔을 벌리면 오른손은 유럽 왼손은 아시아에 닿는다고 한다. 그가 날개를 펼치면 태양빛을 가려 세계가 어둠에 잠식된다고도 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신들의 지배자 자리에 오르자 이에 분노하여 크로노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타르타로스와 관계를 맺어 마지막 자식인 티폰을 낳았다. 일설은 제우스가 바람을 피운 것에 복수하기 위해 헤라가 크로노스로부터 받은 알에서 태어나 델포이의 큰 뱀 파이톤에 의해 키워졌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티폰은 무럭무럭 커 가면서 힘이 생기자 제우스를 물리치기 위해 올림포스 산으로 진군하였다. 올림포스 신들은 전부 이집트로 도망갔으나 전쟁의 신 아테나가 자리를 지키고 제우스를 비웃자 올림포스로 돌아온다.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번개로 티폰신을 제압하고 에트나산을 던져 티폰을 산밑에 가둬버렸다. 고대 사람들은 에트나산의 분화는 티폰이 움직이기 때문이다라고 믿었다.
필립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반쪽 하늘이 회색이었다. 화산이 포효할 때마다 연기는 장밋빛으로 붉어졌다. 반대편 하늘은 우주 끝까지 검었다. 만개의 눈들은 순서를 번갈아 깜박 깜박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연극 세트장 같네요. 아까 낮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 모든 게 같은 하루라니.”
“우리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죠, <필립 모스, 죽기로 결심하다!>”
“저기 떨어지는 게 운석인가?”
“그렇군요. 오... 저게 바로 내 별인가봐요.”
“...운석은 별이 아닌데.”
“계속 지적만 당하네요.”
“별의 조각이었겠죠.”
“아니면 우주 쓰레기거나.”
“우주에 쓸만한 게 얼마나 있겠어요?”
필립은 소리 내어 웃었다. 허리를 꺾으며 웃는 통에 몸이 뒤로 밀릴 뻔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게 그렇게 웃겼어요?”
“아아, 당신 정말 스케일이 크군요!”
필립은 엄지를 치켜 세웠다.
“유쾌하네요.”
“쓸모란 것이 당신에게 큰 화두인가 보군요.”
“그런가? 글쎄... 단지 나는, 지겨워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죄다 번쩍이고 푸르고!”
“이 곳엔 지겨움을 피하기 위해 왔나요?”
“무엇을 위해 왔는지는 오기 전에는 알 수 없어요. 지금에서야 아는 거죠.”
“... ...”
“궁금하죠,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몰라요. 아니 알 필요도 없어요. 무슨 대답을 하든 그건 정답이 아닐 거예요. 그저 확실한 의지만이 있을 뿐이죠.”
“꼭 정답을 말할 필요는 없어요. 진실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진실... 그렇군요. 그냥 나는 <그랑 블루>가 좋았어요. 뤽 베송이 만든건데... 이 영화 봤어요?”
“네 봤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죠.”
뤽 베송 감독의 그랑블루. 그리스의 작은 어촌 출신인 자크는 아버지가 잠수 사고로 죽은 뒤 바다와 돌고래를 가족으로 여기며 외롭게 성장한다. 그에게는 엔조라는 친구가 있어 둘은 잠수 실력을 겨루며 우정을 다져간다. 성인이 된 자크는 오랜만에 엔조와 재회하고, 프리다이버 챔피언인 그의 초청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엔조와 자크 두 바다사나이들의 삶. 조안나라는 뉴욕태생 여자와의 사랑이야기. 그리스의 작은 어촌 마을의 촬영지가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이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8세기에 시칠리아의 해안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2500년 전 그리스인들이 건설했던 도시의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시칠리아이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돌고래가 가족인 남자 쟈크, 뉴욕여자와의 사랑 프리다이버로서의 삶이 영화의 내용이다. 어린 쟈크는 아버지에게 엄마가 왜 떠났느냐고 묻고 아버지는 엄마는 떠난 것이 아니고 돌아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쟈크의 엄마는 뉴욕이 고향인 여자였다. 쟈크가 사랑하게 되는 조안나라는 여자도 뉴욕여자이다. 돌고래가 가족이라고 소개하며 흐느끼는 쟈크, 남자에게 가족은 돌고래와 푸른 바다이다. 이 낯선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조안나. 서로의 감정을 알게 되고,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 후 여자가 잠든 사이 남자는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돌고래와 바다를 희롱하며 밤새도록 놀다 온 남자가 해변가 바위에 쪼그리고 잠자는 여자를 발견한다. 여자도 눈을 뜬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적당한 단어를 찾고 있는 듯한 남자의 눈빛과 이 남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막막해 하는 여자의 눈빛이 마주친다. 여자는 할 말을 찾았다. 여자는 말한다. ‘뉴욕으로 돌아갈래. 그곳에는 나의 일이 있고 나의 친구가 있어’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고작 남자가 한 것이라고는 여자의 짐을 기차역까지 옮겨주는 일이다. 여자와 남자는 다른 행성에서 온 인간임이 분명하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남자도 아닌데 왜 이 남자의 눈빛이 더 잘 이해되는 것일까. 이상하다. 타오르미나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면 이해가 될까?
“왜 이 영화를 좋아해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 ...”
“아마 상실감 때문인 것 같아요.”
“남자의 상실에서 동징감을 느끼나요?”
“아니... 그냥 상실감이 좋아요. 달콤한 슬픔.”
“... ...”
“거짓말이예요.”
필립은 굳이 고백했다.
“사실 저라면, 떠나는 여자를 죽여 버렸을 거예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느껴져요?”
“...뭐가?”
“점점 뜨거워지네요.”
악마의 눈이다. 우리는 땅거죽이 붉은 아우라로 어둠에 경계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절벽이었다. 활화산에 절벽이라니...! 보지 않아도 그 아래는 용암의 강이었다. 나는 무게중심을 뒤로 빼면서 겨우 경계까지 나아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돌물이 지네떼처럼 전진했다. 등껍질 사이로 붉은 핏물이 튀었다. 뜨겁구나. 그 속은 더 뜨겁겠지. 어디부터 떨어지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까? 낙하하면서 기절하는 편이 가장 나을테지. 기절할 수 있을까? 글쎄...
“도착했으니 조금 쉬어요 우리.”
필립은 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바닥을 내려 보는 순간, 필립이 나를 용암 구덩이로 밀어버리는 환상이 뇌리를 스쳤다.
“긴장했군요.”
필립이 말했다. 나는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분리되지 않도록... 필립은 나의 악력에 놀란 듯 웃었다.
“걱정 말아요. 급히 죽진 않을테니.”
“... ...”
그래. 넌 일부러 죽으려고 온 사람이었지.
“우리 와인 마실까요?”
우리는 용암 줄기가 잘 보이는 마른 땅에 자리를 잡았다. 필립은 자신이 대신 매고 있던 내 배낭에서 조심스레 와인을 꺼냈다.
“네, 좋죠.”
나는 아무렇게나 앉았다. 필립은 자신의 스텐레스 컵에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그의 눈이 주의 깊게 내 얼굴을 따라다녔다. 그는 아마 웃고 있는 듯했다. 나는 답지 않게 긴장한 것이 부끄러웠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필립이 건네는 컵을 받았다. 잔을 맞추고 남자는 남은 술병으로 입을 축였다. 취할 정도의 양은 아니다. 죽음의 고통을 소진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은색컵의 바닥을 보았다. 코르크와 포도 찌꺼기가 풍랑 속을 굴러다녔다. 그렇게 점 치기를 마치고 나는 술을 마셨다. 이 피는 내 피로다... 예수 생각이 났다. 결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몸이 나른했다. 오늘 하루 동안 영원을 걸은 듯했다. 나는 필립의 등에 맡겼던 내 배낭을 건네 받았다. 그 속에서 말린 무화과를 꺼내어 반으로 쪼갰다. 필립은 한 조각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사실...”
필립은 운을 뗐다.
“오르면서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내가 이곳에 온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타이타닉의 남자 주인공 같은 대사네요.”
“내가 잭 도슨이군요? 당신이 케이트 윈슬렛이고?”
“아니요, 당신은 그냥 티켓이죠 티켓, 죽음으로 가는.”
“... ...”
하루 종일 이어진 등산으로 우리는 허기졌다. 무화과는 달았다. 윗니에 달라붙은 마른 진액을 와인을 머금은 혀로 녹였다. 육체란 참으로 황홀하구나. 나는 배낭을 베고 드러누웠다. 필립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내 곁으로 왔다. 남자가 눕자 땅이 울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팔을 볼에 괼 때 짧은 머리카락이 바스락 거렸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시선... beautiful beautiful beautiful beautiful boy... 존 레논의 노래가 머리를 맴돌았다. 곧 파괴될 세계. 낙화하는 꽃은 아름답지. 내년 봄에는 벚꽃을 보러 가야지. 감은 눈이 시렸다.
“그래도 내가 디카프리오보단 잘생기지 않았어요?”
“필립,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글쎄, 사랑 이야기...?”
“별 거 없어요. 여자가 있었고 사랑하고 집착하고 끝나고 그런 거죠. 최근엔 같이 작품했던 여배우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 ...”
“이젠 괴물 이야기가 다 떨어졌나봐요?”
필립은 끝까지 변죽만을 울릴 셈인가?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해봐요.”
“...무슨 뜻이죠?”
“까짓것 말해보라구요 진짜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이미 다 말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진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 ...”
“행여나,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키스라도 부탁할 줄 알았어요? 당신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 타입은 아냐.”
남자는 웃었다. 그의 검지손가락이 내 코끝을 살짝 눌렀다.
“필립, 내가 같이 죽어주길 바래요?”
“...오우 지져스 맙소사.”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억울한 듯 입을 들썩거렸으나 말하기에도 황당하다는 듯 이마를 짚은 채 풀숲을 한참 서성거렸다.
“...그렇다면요?”
“... ...”
“그렇다면, 당신은 날 위해 죽어줄 생각이었어요?”
“... ...”
“당신, 나 좋아해요?”
필립의 말은 조롱조로 들렸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나친 자신감이군요.”
“이봐요, 날 좇아온 건 당신이예요. 그리고, 낮에 내가 당신을 구한 건... 누구라도 그러했을 거고 빚진 기분이라거나 그런 거 느낄 필요 없어요.”
“난 빚진 거 없어요.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구요.”
나도 남자를 따라 일어섰다. 필립은 벌렸던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럼 도대체 왜?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분노와 슬픔으로 무너질 듯했다.
“돌아가요.”
“... ...”
“돌아가요, 어서. 당신은 행운이자 불행이군요. 내 마지막 실수였어요. 당신을 허락한 것.”
필립은 와인병을 거꾸로 들어 바닥에 쏟았다. 빈 병의 뭉툭한 바닥을 화산재 흙에 짓이겨 꽂고 남자는 등을 돌려 걸었다. 나는 말했다.
“안타깝네요.”
남자는 계속 걸었다. 나는 또 말했다.
“어쩔 수 없죠.”
남자가 멈춰 섰다.
“당신은 내 죽음을 망치고 있어요!”
남자는 화를 냈다.
“내가 외로워서 미친 영혼으로 보였나요? 아니면 자살로 세상에 복수하려드는 어린애로 보여요? 해결되지 않은 결핍으로 파멸을 좌초하는 어린 양으로 보여요? 내가? 그래서 당신이 나의 구원자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제발 착각하지 마시죠!”
남자는 표효했다.
“그럼 뭐죠?”
“뭐가요!”
“지금 갈등하고 있잖아요.”
“뭐라구? 이런 맙소사! 아니예요, 결코!”
남자는 괴로워했다.
“필립이 아까 당신이 내게 말했던 괴물은 폴리페모스예요. 그렇죠? 여자에게 버림받아서 여자와 연적을 죽이고 싶어 하는 괴물이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당신, 죽이고 싶은 여자가 있죠.”
“... ...”
폴리페모스 이야기. 폴리페모스는 눈이 하나인 거인 괴물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두 남자의 질투와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갈라테아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바다 님프 혹은 물의 신 네레우스와 도리스의 딸로 말해지며 시실리 남부 해변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그녀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녀여서 두 명의 구애자가 있었다. 젊고 다정한 연인 아키스와 난폭한 거인 구혼자 키클롭스(폴리페모스)였다. 그녀는 아키스를 선택했고 거절당한 키클롭스는 처음에는 피리로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질투에 미치고 만다. 그의 사랑은 에트나 화산이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듯이 뜨거웠다.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는 질투와 분노를 참지 못해 손에 잡히는 대로 큰 바위를 집어 들어 해안가로 마구 던졌다. 시칠리아의 암석지형 해안가는 그때 던진 암석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삼각관계의 원형에 관한 신화이다.
“당신은 내게서 어떤 패륜 이야기라도 바라는 것 같군요. 마더 퍼커라거나...”
“필립...”
“아니. 틀렸어요, 당신은 철저히 틀렸다구요! 그 반대죠. 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요.”
“여자가 있었다고 했잖아요.”
“있었지. 난 늘 여자가 있었어요. 여자들은 날 사랑했어요.”
“당신은 사랑하지 않았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여자들을 부러워했어요. 그 마음을! 나도 욕정에 빠져든 적은 있었지만... 그러나 사랑은 아니었어요.”
“... ...”
“나는 연극을 연극했어요. 사랑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어. 나는... 내 인생은 가짜였어요.”
“왜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라고 생각했어요. 주변엔 너무도 멋진 여자가 많고... 그러나 선망할 뿐 사랑할 순 없었어요. 나는 결코 여자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나는 소비되었어요.”
“그것이 당신의 절망의 원인인가?”
“나는 절망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아도 돼. 강박을 버려요.”
“당신은, 당신도 역시 사랑이 가장 훌륭한 것이었나? 당신 인생에서?”
“최근에 사랑을 잃었어요.”
나는 뜻밖에도 쉽사리 고백하였다.
“낮에 안부를 전하던 남자가 있었잖아요?”
“그는 제 남편이예요.”
필립은 말뜻을 알아듣고 유쾌하게 웃었다.
“정말? 그래서 당신도 죽으려고 하는 건가?”
“아니, 나는 웃으면서 보내주었어요. 풍선이 터져버리듯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이해할 수 없어요.”
“순간은 영원하니까. 시간의 흐름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마음이 변했어요.”
필립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죽었으면 좋겠어요.”
“죽겠어요.”
“이런 제길, 당신의 초연한 모습을 참을 수 없어!”
“왜지?”
남자는 내게 다가왔다. 남자의 두 팔이 나의 양 어깨를 잡았다.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글거렸으나 분노는 없었다.
“어쩌면 당신이, 내 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 되요.”
“이봐요, 어쩌면 나에 대한 감정은 생에 대한 미련이 투사된 것인지도 몰라요.”
“... ...”
필립의 눈에서 불이 꺼졌다.
“그래요,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군요. 내 무례를 용서해주길 바래요. 이제 나는 정말 죽겠어요.”
남자는 배낭의 지퍼를 잠궈서 내게 건네주었다.
“혼자 갈 수 있죠?”
“... ...”
“이 배낭에 삶에 대한 미련이 가득 실려 있더군요.”
필립은 울퉁불퉁한 화산석의 절벽을 올랐다. 그의 두 발은 흙과 공기를 반씩 밟고 있었다.
“지켜볼 생각이예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시가를 더 가져올 걸 그랬어요. 불을 보니 담배가 피고 싶네.”
“다시 내려가서 가져올까요?”
필립은 내 농담에 웃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여자야.”
“필립,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어떠한 상황에도 압박감을 느끼지 말고.”
“... ...”
“상황에 떠밀려서 선택 아닌 선택을 해서는 안돼. 죽고 싶으면 죽고 살고 싶으면 살도록 해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필립은 뒤돌아섰다. 양손을 파자마 주머니에 담은 채. 장소보다 주인공의 초연함이 더욱 위험해 보였다. 은하수가 휘장처럼 드리워지고 우주라는 객석에는 만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공연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나는 살고 싶어요.”
필립은 말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어서 가자. 왔던 길로 돌아가자. 아직 거기까진 진행하지 않았을 거야. 굉음이 울렸다. 축포라도 터뜨리듯 에트나가 다시 화염불을 뿜었다. 서둘러야 한다. 서두르면... 아직 벗어날 기회는 있겠지? 나는 탈출로를 눈으로 더듬었다.
“...필립?”
절벽이 비었다.
곁눈질을 하지 않아도 주변에는 남자가 없다. 남자가 없다. 없어. 발을 헛디뎠나? 굉음과 함께 축이 무너졌나? 아니다... 그대로다. 남자가 뛰어내렸구나. 용암이 쉬이 – 소리를 냈다. 아지랑이가 괴물의 입김처럼 피어올랐다. 확인해야 할까. 발이 차마 떨어지질 않는다.
‘이 산엔 괴물이 있대요.’
‘여자들을 홀려서 잡아먹는 괴물이요. 이런 붉은 달밤이면 여자들을 미치게 만들어서 자살하게 하는 거죠. 그러면 괴물은 벼랑 끝에서 여자의 떨어지는 몸을 낼름 잡아먹어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죽을 수 있는 절벽이. 그리고 괴물이. 그의 죽음에의 의지가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용암은 나선형으로 돌기를 멈췄다. 필립 모스. 여기 잠들다.
나는 허망하게 산을 내려왔다.
기적이라고들 했다. 많이들 죽었다고 했다. 허름한 바에서 베이컨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며 모서리에 걸린 TV로 뉴스를 시청했다. 가게 주인은 내 팔의 그을린 자국을 보고 시접에 꿀을 얹어 가져다주었다.
“사촌 누이가 조금 윗산에서 레스토랑을 하는데 이번 폭발로 화산재에 잠겨버렸다지 뭡니까. 누이가 만든 팬케이크예요. 맛이 아주 일품이죠.”
“네 아주 맛있네요.”
“이 꿀도 직접 만든 거예요. 제 큰아들 녀석이 양봉을 좀 하거든요. 근처에 배밭이 있어요. 에트나산 꿀이 세계 제일이죠.”
“이렇게 위험한 지역인데 일가족이 다 살고 있군요.”
“이 산이 간혹 생명을 앗아가지만 살 수 밖에 없어요. 비옥한 흙을 올려주거든요.”
뉴스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태리어가 반복되었다. 앵커의 진홍빛 재킷이 예뻤다. 네모칸에 실종자의 얼굴이 하나씩 비쳤다. 갑자기 필립의 얼굴이 보였다. attore americano(미국 배우)... 레드 카펫에서 무스를 많이 바른 남자가 여자와 활짝 웃고 있었다. 붉은 행커칩, 뇌살적인 푸른 눈. 하얀 이마에 플래시가 번쩍했다. 다음 화면으로 이어졌다. 에트나의 폭발을 위성으로 본 영상이었다. 명치가 뻐근했다.
“많이 죽은 모양이네요.”
“네. 저 미국 배우도 죽었죠, 여기 에트나에서.”
옆에서 신문을 읽던 남자가 말했다. 억양을 들으니 미국인 같았다.
“필립 모스라고...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꽤 괜찮은 배우였어요. 연극에 충실하고, 사생활도 깨끗한 편이었죠. 연기도 잘했어요.”
“잘 아시네요.”
“제 딸애가 좋아했어요. 저와 같은 예일 출신이라 관심도 있었구요.”
“기자시군요.”
“네, 전 취재 차 이곳에 들렀어요.”
반가웠다. 나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자신을 제프리 라고 소개했다. 회색 폴로티가 한 번 접히는 통통한 뱃살이었지만 안경 너머의 감색 눈빛은 날카로워 보였다.
“사실 등산하면서 그 배우를 만났어요. 저와 많은 시간을 보냈죠.”
“네? 필립 모스를 봤다구요?”
“네, 실종되었다니 유감이군요.”
나는 필립의 최후를 소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제프리는 내 팔의 상처를 한참 바라보았다.
“필립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는 작년에 죽었으니까요. 저 뉴스는 과거 사건을 리마인드 하는 거예요.”
“...!”
제프리는 약간 탄 스크램블드 에그를 포크로 조금 집어먹었다. 바의 주인은 에스프레소잔에 설탕을 뭍여 두 잔을 내왔다. 그가 흰 앞치마에 두터운 손을 슥슥 닦는 것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인이 말했다.
“기자 양반 말이 사실이예요. 에트나에 그 배우의 펜션이 있거든요. 거기 머물면서... 이층 테라스에서 낙상했어요. 죽을 높이가 아닌데... 목뼈가 부러져서 죽었죠. 술에 취해 떨어졌겠죠. 아니면 마약이거나...”
제프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야. 자살한 거야. 유서는 없었지만... 당시 사귀던 여자가 바람을 피워서 많이 괴로워했었지.”
“술에 취했던 건 확실해. 이층에서 떨어져서 죽는 건 말이 안돼. 그는 화산이 터지는 걸 구경하러 왔던 거야. 당시에도 화산이 터질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두 남자는 나의 슬픈 눈을 조금 놀란 듯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필립과 사귀던 여자요?”
제프리는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지내요. 당시 바람 피우던 영화 감독과 최근에 작품 하나를 찍고 있죠.”
나는 바의 주인이 알려준대로 필립의 팬션을 찾아갔다. 어젯밤과 달리 화산재에 뒤덮혀 뿌연 회색빛이었다. 물이 출렁대던 수영장에는 화산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필립이 서 있던 난간에는 노란 테잎이 크게 엑스자로 붙어 있었다. 나는 계단의 바리케이트를 옆으로 치우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어젯밤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욱한 먼지가 발자국을 남길때마다 뛰어올랐다. 나는 달에 온 최초의 이방인이었다.
‘침대 스툴에서 찾았어요.’
‘불을 보니 시가가 피우고 싶네요.’
나는 침실로 들어갔다. 낮은 이층 스툴. 서랍장이 기기익 소리를 냈다. 시가가 은갑 안에 네 개 정도 들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럼 필립은... 그 배우는 화산을 기다린 걸까요?”
나는 제프리에게 물었었다.
“어쩌면 그 여자를 기다린 건지도 모르죠.”
그가 대답했다.
‘죽이고 싶은 여자가 있죠.’
나는 필립에게 물었었다.
‘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가 대답했다.
시가의 연기가 에트나의 것처럼 망연히 피어올랐다. 재가 떨어지자 나는 불 피우기를 끝냈다. 담뱃갑을 닫았다.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말간 은색에 슬픈 얼굴이 비쳤다.
시가 케이스에는 ‘필립 모스’라고 쓰여 있었다.
'절벽이 비었다.'
잘 축조된 성벽이 생각난다. 하나하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커다란 돌덩이들.
서로 맞물려서 비바람을 이겨내며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성벽. 그들은 서로 아주 친해 보인다.
거리를 좁히지도 넓히지도 않으면서 곁에서 절대 멀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돌덩이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던 중에 한놈이 배반을 한다. 홀연히 자신의 자리를 비워버리는 거지.
어디로 갔는지 언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그 자취를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찾아본다. 그러나 없다.
부재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왜 가버린 걸까. 우리가 뭘 잘못했나?
모두가 생각을 하지만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한다. 삶에서 이어진 작은 인연들이 순식간에 커다랗게 커져간다.
쭈글거리던 풍선이 커다란 애드벌룬만큼 커진다.
그랬다. 부재의 두려움. 무서움. 안타까움.
부재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다. 천만년을 함께 있을 것같은 이의 부재도
하루를 함께한 이의 부재도
인간은 부재를 원하면서 부재를 견디지 못한다.
절벽이 비어어린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고마웠다. 이런 단어를 구사해준 작가에게...
아마도 내가 서연이라면 TV를 시청하는 일은 없었지 않았나 싶다.
서연은 이미 에트나를 찾을때 부재의 아픔을 배낭에 넣어 가지고 갔을 테니까.
삶에의 무게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를 배낭가득 구겨넣고 갔었을거니까.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472 |
[5월 2주차] 지금 이 순간 ![]() | 라비나비 | 2013.05.13 | 2022 |
3471 | 9-2 마침내 별이 되다 (DS) [15] | 버닝덱 | 2013.05.13 | 2081 |
3470 |
5월 2주차 칼럼 -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려는 이유 ![]() | 유형선 | 2013.05.13 | 2156 |
3469 | #2. 필살기는 진지함이다. [8] | 쭌영 | 2013.05.13 | 2051 |
3468 | 떠날수 밖에 없는 이유 - (9기 최재용) [16] | jeiwai | 2013.05.11 | 2492 |
3467 | 산 life #3_노적봉 [6] | 서연 | 2013.05.09 | 2905 |
3466 | 2-4 너는 나의 미로 | 콩두 | 2013.05.08 | 2310 |
3465 | 가까운 죽음 [12] | 한정화 | 2013.05.07 | 2419 |
3464 | 산 life #2_마이너스의 손, 마이더스의 손 [1] | 서연 | 2013.05.07 | 2614 |
3463 | 저와 함께 춤추시겠어요 [6] | 한젤리타 | 2013.05.06 | 2195 |
3462 | (No.1-1) 명리,아이러니 수용 - 9기 서은경 [13] | tampopo | 2013.05.06 | 2033 |
3461 |
[5월 1주차] 사부님과의 추억 ![]() | 라비나비 | 2013.05.06 | 2358 |
3460 |
연 날리기 (5월 1주차 칼럼, 9기 유형선) ![]() | 유형선 | 2013.05.06 | 2272 |
3459 | 나는 하루살이 [14] | 오미경 | 2013.05.06 | 2184 |
3458 | Climbing - 6. 오름에도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1] | 書元 | 2013.05.05 | 1989 |
3457 | #1. 변화의 방향 [7] | 쭌영 | 2013.05.05 | 2086 |
3456 | 9-1 마흔 세살, 나의 하루를 그리다(DS) [7] | 버닝덱 | 2013.05.04 | 2168 |
3455 |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9기 최재용) [19] | jeiwai | 2013.05.04 | 2095 |
3454 |
시칠리아 미칠리아 - 소설 전체 ![]() | 레몬 | 2013.05.01 | 2213 |
» | 시칠리아 미칠리아 - 몬스터 (수정) [2] | 레몬 | 2013.05.01 | 22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