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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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이 스산하니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하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주황색 가로등만이 어두컴컴한 길을 밝히기 위해 쓸쓸히 서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아이는 잠들어 있다. 조용하다. 평소 같으면, 아이가 잠들어 있는 이 시간을 마음 편히 즐겼을 나인데 오늘은 왠지 그렇지가 못하다. 옷을 벗고 간단히 씼었다. 계속되는 저녁 약속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기에 오늘은 맘 편이 잠을 자려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긴 팔 윗도리를 입었다. 자크를 올리면 목을 감싸주는 쥐색 긴팔 운동복. '사부님 옷이네......'
지난 주말, 사부님(구본형선생님) 댁에 방문을 했다. 추석 전에는 변경연 사람들이 으레 방문했던 모양이다.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추석 전이기도 했지만, 사모님이 9기 연구원을 비롯한 연구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시고 싶다고 하셨단다. 이런 저런 사정을 따지면 사모님 입장에선 아낌없이 사랑해주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마냥 싫어하기도 한 우리들인 듯 했다. 하지만, 시간도 흐르고, 많은 변경연 가족들의 노력이 또 하나의 결실로 맺어지는 즈음이었기에 우리들의 사부님댁 방문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듯 했다.
사모님과 따님이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부님댁은 내 상상과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부님 글에서 언뜻 언뜻 묘사했던 집 풍경이라 내 나름 머리 속으로 상상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건 아니었다. 주차문제로 이웃과 싸움을 하던 대문앞도 보였다. 사부가 이런 저런 손질을 하며 시원한 산바람을 느꼈을 아담한 정원도 보였다. 사부님 책에서 집에 대한 가장 큰 자랑거리이라면, 확트인 풍경과 조망이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방문한 사부님댁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사부님이 자랑스럽게 묘사하셨던 확트인 풍경이 아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사부님의 책상. 댁에 방문해 올라간 2층. 사부님의 책상과 책들이 빼곡히 놓여 있는 책장. 벽에 붙어 있는 피아노...... 사부님의 책상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짠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감정이었다. 노트북 한대와 사부님이 평소 좋아했던 것을 보이는 열권 즈음 되보이는 몇몇 책-관자,러셀,서양철학사,사기열전등-이 놓여진 책상. 그 책상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같이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느낌을 갖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런 저런 사부님의 공간을 보고 있는데, 따님이 말했다. 사부님 유품(옷) 몇 점이 있으니, 갖고 싶으신 분들은 가져가도 된다고...... 난 진열된 몇 점의 옷들 중 하나를 골랐다. 쥐색 운동복. 목을 감싸주는 긴팔. 쌀쌀해지는 가을날에 적합한 듯 했다. 예상외로 사부님 사이즈가 나와 맞을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난 사부님의 일상을 닮은 유품 하나를 더 가지게 되었다 ( 지난번 갖게 된 유품은 사부님이 즐겨 하셨을 허리띠였다 ).
며칠이 지난 오늘, 사부님의 두 권의 유고집에 대한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오늘 찍사로써 참석했다. 많은 사람들이 웃었고, 울었다. 사부님이 떠나신 뒤, 5개월 가량의 시간은 우리들에겐 슬픔보다는 즐거움과 그리움, 아쉬움의 감정이 크게 다가왔다.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고, 또 다른 이들은 마음 속으로 울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즐겁게 추억하고 숨겨진 에피소드를 들으며 한껏 웃었다. 무엇보다도, 사모님과 따님이 밝게 웃는 모습이 좋았다. 다행이었다. 그들이 가진 이 아쉬움과 슬픔, 어찌 한 순간의 웃음으로 치료되겠냐마는, 그래도 그들의 밝은 모습을 볼 수 있어 마음 한켠이 가벼워졌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되도록 밝은 모습을 담으려 했다.
렌즈도 일부러 인물이 밝게 부각될 수 있는 50.8 니콘 단렌즈로 준비했다. 그 정도 DSLR 이면 사진 못찍는 나도, 괜찮은 분위기의 인물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부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의 웃음과 에너지, 사부님과의 추억, 향수, 멋진 노래, 즐거운 바순 연주, 그리고 단렌즈 달린 DSLR. 이 재료들로 나는 사부님이 사랑하는, 그리고 사부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과 즐거움 을 담을 수 있었다.
한동안 편안하게 지냈다. 처음엔 지지리 복도 없는, 만나자 마자 이별할 수 밖에 없었던 박복한 나의 운명에 허탈해했었고, 한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보고싶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가진게 없으니 잃은 것도 없고, 함께한 추억도 없으니 그리워할 것도 없고, 결국 슬퍼질 염려도 별로 없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지난 며칠 간, 잠깐 떠나있던 슬픔이 다시금 내게로 찾아왔다. 그의 책상을 보며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출간기념회를 보고 그가 자신의 소감을 말하는 순간을 그려보았다. 느슨해질대로 느슨해진 우리를 다그치고 혼내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화관을 쓰고 환희 웃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쓸쓸한 가을 밤, 사부가 그리워진다.
* 지극히 사적인 글입니다. 사실 '사부' 또는 '사부님'이 아닌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는걸 좋아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사부'라 부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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