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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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어느덧 한주의 마지막(?!)인 금요일입니다. 내일은 주말이니 오늘보다는 기분이 좋겠지요? 며칠전 통화해보니 목소리가 한결 편안해지신듯해 마음이 놓였습니다. 몇 주간 부비동염에 시달려 몸이 안좋으셨단 이야기를 듣고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한게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올해 눈수술도 하시고, 치과도 자주 가시고 아픈 곳이 늘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안좋습니다. 더는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퇴근길에 자주 찾는 중고서점에 갔습니다. 제비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사람들의 손을 적어도 한번은 탄 책이 이상하게 안정감 있어 좋기도 하고, 가격도 싸니 금상첨화이지요. 서점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여느때와 같이, 같은 동선으로 움직였습니다.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들 코너를 보고, 출간된지 6개월 이내의 책들을 모아놓은 코너를 본 뒤, 세계문학전집과 두꺼운 가격 좀 되는 인문사회과학 서적 코너를 훑었습니다. 한 바퀴 돌고나니 제 손에 다섯권의 책이 들려 있더군요. 그 중 충동구매로 생각되는 책을 한권을 내려놓으니 총 네권이 남았습니다.
'그림 여행을 권함(김한민)'
'나에게 여행을(박사)'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정희재)'
'홍콩에 두 번 가게 된다면(주성철)'
별 생각없이, 계획없이 들러 한바퀴 돌며 고른 책들을 보았습니다. 문득 요즘 제가 책을 택하는 책들을 보면 몇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더군요.
1) 소재가 '그림','여행','영화','일상','삶' 과 같은 것들이다.
2) 작가가 일류작가나 전문작가 보다는 시작하는 사람이거나 업을 달리하고 있는 사람, 또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다.
3) 돌직구처럼 지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책보다는 일상과 자신을 바라보며 은근하게, 은은하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톤의 책들이다.
아마도, 제가 쓰고 싶은 책들이, 제가 쓸 수 있는 소재와 주제가 그 정도이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책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어째서 이런 소재의 비슷한 책들에 눈이 돌아가는걸까?' 생각해보니 그리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습니다. 정답은 바로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더군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는 예술적 기질이 많으셨습니다. 처음 업으로 삼은 것이 이발이셨고, 그 사이사이 돈을 받고 사진을 찍는 일도 하셨지요. 집에 고쳐야 할 것이 있으시면 척척 고치고, 탁자나 의자와 같은 간단한 가구들은 목재를 구해다가 톱과 망치, 못으로 뚝딱뚝딱 직접 만드시는 것 쯤은 일도 아니셨습니다. 그뿐 아니지요. 정식 교육 한 번 받지 않고 뽕짝 톤의 기타연주를 기가막히게 하셨고,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솜씨는 일품이셨습니다. 아버지의 하모니카 연주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지요. 저의 장모님도, 외가댁 식구들도 모두들 아버지의 하모니카 연주를 좋아했습니다. 물론 당신의 손주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한 번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집에 조금 넉넉해서 공부를 할 환경이 되었으면, 아마도 시를 쓰면서 살았을 수도 있다고....... 이런 것을 보면 제 관심사나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저의 기질에서 아마도 아버지 자신의 모습을 보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적 음악과 만화에 빠져 있을 땐 곧잘 저를 탓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조금 아이러니 한 것 같습니다. 당신을 꼭 닮은 아들인데, 당신을 닮은 것이 싫어서인지 다른 이유에선지, 당신과 비슷한 것들을 좋아하는 절 탓하셨으니까요. 여하튼, 아버진 그깟거 돈 안되니 공부해서 공무원이나 하라고 하셨지요. 그 시절 전 마음에 상처를 받았지만, 아버지 뜻대로 했습니다. 적당히 공부를 하고, 적당히 성적을 받아 적당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운좋게 제때 취업도 하고 결혼까지해서 자리를 잡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별 무리없이 사회생활 잘하고 있는 아들이 다시금 글을 써보겠다고 하니 아버지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신 듯 합니다. 그냥 편안히 안정적인 회사생활하면 되지 왜 글 같은걸 쓰냐며 며느리에게 여러번 얘기하셨다고요.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엔 기질대로 살아가게 되는건가' 이렇게 말이죠.
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제 기질을 억누르고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다시금 그 기질안으로 들아가고 있으니 말이지요. 이렇게 타협하지 못하는 것도 아버지로 부터 물어받은 것이겠지요?!
지금 이 시간들이 한 순간의 경험으로 끝날지 또는 취미로 머무르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지금은, 마음이 흐르는 물길을 억지로 막지 말고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놔두는게 좋지 않나 라는 생각 뿐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불안한 마음으로 거두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큰 기대도 실망도 하지 마시고 그냥 그렇게, 편안히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춘천은 서울보다 더 하지요. 그곳은 유난히 일교차가 심하니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 조금씩 노쇠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좋습니다. 어디 아프시면 예전처럼 미련하게 혼자서 끙끙 앓지 마시고, 병원도 다니시고 약도 드세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며칠 뒤에는 추석이니 뵐 수 있겠네요. 아버지가 이뻐라 하는 손주녀석 데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손주하고 놀아주실려면 체력이 되셔야 하니까, 병원도 다니고 푹 쉬고 계세요. 곧 가겠습니다.
p.s 이번에 갈 때는 지난번 몽골에서 샀던 그림과 몽골사진 몇 장 현상해서 가겠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2013년 9월 13일 금요일 밤, 서울에서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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