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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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봤어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나는 이 말을 알아 듣는다. 요즘 내게 전화하는 고객들의 주요관심사는 비슷하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속한 그룹의 자금사정이 어떠한지를 궁금해하는 전화이다. 동종업계에서 발생한 사태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다. 어쩌면 솥뚜껑이 아니고 정말 자라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투자자의 불안이 충분히 공감이 간다. 기업의 생사를 장담하기에는 변수가 너무나 많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D그룹과 비슷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 1순위라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린다. 주말에도 비슷한 내용의 방송을 본 모양이다. 전화도중 보호자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지금 병원 응급실에 대기 중이다. 어제저녁 남편이 응급실에 실려온 상황이라고 말한다.
"지점장님이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지만 않았어도 오늘 같은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웃으며 말을 하지만 이 말에는 나에 대한 뼛속 깊은 원망이 서려있음을 나는 안다. 그 원망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동의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그 직원을 데려다 놓은 것은 내가 결정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 것이란 것에는 동의한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나와의 거래를 지속하는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듯하다. 실패한 투자의 당사자보다는 내가 말하기 편하다는 이유와 당신의 책임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자산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는 죽을 때까지 필요한 일인데 투자상품에 대한 지식과 그것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시장 내부 사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나의 장점을 보았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지점장님하고는 절대 손해나는 투자상품은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래 봐야 하니까요.” 수익이 잘 날 때는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얼굴 맞대고 말하기 껄끄러우니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품 말고 안정적인 상품에 투자하고 싶단다. 편하게 마실 다니듯이 다니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런 기준에서 선택한 상품이 채권이었다. D그룹의 법정관리(法定管理)행으로 위축된 시장의 심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고객의 모습을 본다. 자신이 투자해놓은 채권이 다음타자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회사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중이다.
나는 설명을 한다. 투자된 회사의 자금 스케줄을 설명하고 향후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에 대하여도 설명을 곁들인다. 마음에 불안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어떤 설명으로도 의심이 없던 본래 상태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마음이란 것이 본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한번 일어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일으키는 법이니까.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를 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응급실에 누운 환자도 위기상황이지만 투자한 자금을 날리는 일도 그에 못지 않은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돈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녀에게 투자실패는 존재감을 잃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스스로 실패의 경험을 덧붙이기 싫은 것도 한몫하고 있는 중이다.
“6개월 남은 투자기간 동안 투자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이 발생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회사의 운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 대하여는 담보할 수 없으니 편하신 대로 결정하시면 업무는 봐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킨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일임을 나는 안다. 강요된 마음은 편지 않고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나도 내가 지금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시장상황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니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지금은 매도하고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결정을 하고 난 후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비슷한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그녀는 내게 말한다. “이 일은 좋은 직업은 아닌듯해요. 결과가 좋으면 별말을 안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갖 원망을 들어야 하니. 투자결과가 늘 좋으란 법은 없는데…” 그녀는 솔직한 편이다. 스스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원망에 대하여 숨기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는 자신의 불교강의라는 글에서 “업이란 너무나 정교한 정신적 구조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의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인연의 천을 짜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지, 행동, 잠, 불면 그리고 꿈까지도 이 천을 구성하는 실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그 천을 짜고 있는 것입니다.” [보르헤스 문학전기 328P]
씨실과 날실이 쉼 없이 교차하여 천이 만들어지듯 인연의 천을 짜고 있다는 그의 말은 업이란 단어를 잘 설명한다. 고객으로부터 주기적으로 듣는 원망의 말도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일 테고 지금도 쉼 없이 짜고 있는 그 천이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하는 일이다. 돈을 잘 버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 오늘은 후자를 선택하는 걸로 나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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