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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3일 07시 40분 등록

No37.                                               누가 자유를 주었는가                                    오미경. 2014.01.13

 

공공 문제의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였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대중들로부터 눈총을 받았고 바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주말에 ‘버틀러’란 영화를 봤다. 버틀러란‘대통령의 집사’라는 의미이다. 실존 인물 유진 앨런을 영화한 것이지만 허구와 사실을 혼합화했다 한다. 주인공 세실 게인즈는 백인 소유의 목화 농장에서 태어난 흑인 노예의 아들이다. 세실이 어렸을 때 어머니를 겁탈한 백인에게 단 한 마디의 말과 함께 반감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버지가 사살당하는 것을 목화농장 한가운데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 후로 백인의 집에서 '검둥이 하인(House Nigger)'으로 살았지만 얼마 후 세실은 고향을 떠나 타지로 향합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이 방랑했던 그는 우연히 한 레스토랑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그의 상사는 말한다.

 

“백인을 위한 얼굴과 자신을 위한 얼굴 두 개의 얼굴로 살아가야 한다. 백인이 원하는 것을 읽어라. 사람의 마음을 읽어라. 서빙 할때는 없는 듯이 해라. 귀가 있어도 듣지 말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말라” 등. 흑인이 서빙하면서 백인사회에 살아가기 위한 지침을 알려준다. 세실의 성실성과 근면함이 인정받아 백악관에서 일하는 버틀러로 추천받아 들어간다.

 

흑인으로서 30년 이상을 근무하면서 무려 8명의 대통령이 미국의 역사와 함께 흘러가는 것을 옆에서 바라본다. 미국이라는 민주주의가 흑인에 대한 차별성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를 주인공 세실을 통해 흑인인권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에밋 틸이라는 소년이 백인들에 의해 죽었다거나,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한 '자유 버스'가 KKK에게 습격을 당했고, 식당에서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고 해서 경찰에 체포되는 등 미국에서 백인이 흑인에게 가한 차별적 억압을 역사의 현장과 함께 보여준다.

 

세실은 부인 글로리아 사이에 두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 루이스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흑인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클럽에 들어간다. 둘째 찰리는 베트남 참전에서 전사하여 죽음으로 돌아온다. 세실은 백악관에서 일하다가 tv에 나오는 뉴스에서 큰아들 루이스가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하여 경찰에 체포된 것을 보게 된다. 이때부터 세실과 루이스의 갈등이 시작된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해답이 아니라 제기된 문제이다.

 

마틴 루터 킹과 달리 극단적인 투쟁을 선포했던 말콤 엑스는 한 연설에서 '하우스 니거,House Negro'와 '필드 니거, Field Negro'의 차이를 말했다. 'Field Negro'는 들판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온갖 괄시와 모멸을 겪는 동안에, 'House Negro'는 백인 옆에 붙어서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고 비판한다. 루이스의 아버지 세실은 'House Negro'였다. 같은 흑인이여도 백인 사회에 적응하는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대학을 다니면서 흑인 인권운동을 한 루이스는 2년 동안 16번 감옥을 드나든다. 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앞장 선 루이스는 의원이 된다, 아들 루이스는 세실이 생각한 것처럼 사회에 해를 끼치는 불온한 자가 아니었다. 루이스는 흑인 인권을 위해 끊임없이 사회의 인식과 변화를 요구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아버지 세실은 아들 루이스를 마음속 깊이 이해하게 된다. 여전히 길거리에서 흑인인권에 대한 시위를 주도하는 루이스를 찾아가서 세실은 그동안 미안했다고 말한다.

 

많은 것을 배워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 헤라클레이토스

 

배움과 삶은 따로따로가 아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같은 인간인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에 질문을 했다. 식당에서 흑인이 따로 앉는 자리가 있고, 흑인이 레스토랑에 들어온다는 이유만으로 침을 뱉고 커피를 얼굴에 뿌리고 일어나지 않으면 백인들이 몰려와 폭력을 행사해도 법은 여전히 백인들 편이었다. 잘못은 백인전용인 레스토랑에 들어간 흑인 잘못이었고, 버스에서 뒤 칸에 타지 않고 앞좌석에 있어도 그건 법을 어기는 행위로 감옥에 가야 하는 현실을 바라봤다. 루이스는 같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존중해달라고 호소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지만, 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행동함으로써 조금씩 변화하는 세상을 가지게 되었고, 흑인으로서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당선되는 것을 보게 된 세실은 루이스를 부르며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흘린다.

 

러셀의 조부는 1832년 ‘선거법 개정안’을 의회에 통과시켰다. 러셀은 조부의 피를 이어받아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것에 실패하지만, 자신의 나름대로 저술과 강연으로 사회에 참여한다.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징병반대와 원자수소폭탄 사용금지를 위한 핵무기를 반대하는 반핵운동에도 참여한다.

 

러셀에 따르면, 합리적 정신이 근대과학을 성립시켰으며 이 과학적 정신이 뒷받침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과학의 정상적인 진보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과학적 지식’이 어느새 ‘과학적 기술’로 변질되어 버렸다. 본래 기술은 인간의 정신에 종속된 것이다. 그것이 또 어느새 반대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다. 과학이란 기차의 ‘시간표’와 같은 것이다. 시간표는 여행자에게 어디까지나 수단으로서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 주체적인 가치판단인 것이다.

 

군중이 하는 나쁜 짓에 은둔하지 말라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러셀의 지적 솔직성과 진리에 대한 타협 없는 성실성이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영국 정부는 러셀의 강연이 전쟁 수행을 방해하며, 육군의 징병모집에 중대한 장애가 된다는 판단했다. 러셀이 미국 파견군을 중상하고, 영국정부에 대한 매도를 함으로써 그는 감옥행을 감행해야 했다. 러셀은 말한다.

 

“나는 황야에서 혼자 부르짖는 소리를 끝내고 싶지 않가. 사람들에게 듣게 하고, 또 대답할 수 있는 소리를 말하고 싶다. 이것이 역사이다.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양심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진리를 향한 발걸음에 주위와 인연이 뚝 뚝 끊어졌지만, 러셀은 굽히지 않았다.

 

러셀을 읽으면서 이렇게 멋진 인생이 있을까. 버틀러 영화를 보면서 감옥행을 무슨 나들이 하듯이 가볍게 받아들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이 믿는 것을 행하는 루이스를 보면서 고개가 숙연해졌다. 나는 과연 이 시대를 살면서 조그만 빛의 역할이라도 하고 있던가. 군중이 하는 나쁜 짓에 그냥 방종만 하는 것은 같이 죄를 짓는 것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죄가 있다. ‘오래 사는 것보다 훌륭하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양심이 있고 사회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 할려는 자기 실천이 자유를 향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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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4 16:04:45 *.209.223.59

진중한 글이 자세를 바로 하게 하네요.

사실 지겨운 것은 정치판일 뿐, 사회문제도 실로 다양하고 의미있는 움직임도 많을 텐데

너무 모르쇠~ 하고 살고 있구나 싶어요.

 

자꾸 좁아지는 내 관심사를 콕!  찔러 주는 글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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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2 11:06:12 *.11.178.163

저도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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