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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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가 되려는 욕망
오늘 새벽에는 물을 말린 오렌지쟈스민 잎이 우수수 떨어졌어. 제라늄 꽃대가 두 대 올라왔는데 한 개는 흰 색인데 하나는 색을 모르겠어. 장마 휴지기 이후에도 한동안 꽃을 피우지 않았어. 아빠는 4시까지 잠을 못이루더니 잠든 지 2시간이 지나자 숨소리가 골라지는 것 같아. 타이핑 소리가 방해할까봐 서둘러 문을 닫았지. 나는 새벽에 글을 쓰고 싶어한단다. 엄마가 연구원 졸업을 위해 써야할 책의 주제는 ‘신화’야. 달포 동안 거기에 신경을 안 쓰고 너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쓰고 있네. 그건 제자리 걸음 상태야. 어렵거든. ‘신화는 한 물 간 유행’이라거나 ‘네 글은 너무 장황하고 횡설수설이 난무해서 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어. 중요한 건 내가 매일 그 주제에 대해 한 페이지씩이라도 쓰고 있느냐인데 그리 못하고 있어. 글을 쓰려고 하면 막막하고 속이 답답해져서 회피용 킬링타임에 들어가.
방학한 지 2주가 지났어. 지금까지는 약 먹고, 낮잠 자고,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했어. 잘 먹고 잘 쉰 덕분에 기운이 많이 난다. 나의 첫번째 관심사는 너를 만나는 데 있단다. 그러면 안되겠지. 다들 마음 비우라고, 신경 끊으라고 충고하고 계시거든. 나는 못 그러고 있어. 익숙한 질분비물을 보고서 ‘이게 혹시 인터넷에서 말로만 듣던, 착상시기에 보이는 갈색 분비물 아니냐?’ 꿈을 가지고도 전 꿈의 태몽화를 획책하며 ‘이거 쌍둥이 꿈 아니야? 세 쌍둥인가?’ 백일몽에 빠지고 있거든. 임신테스트기 지름신은 아직은 내리지 않고 있어. 미리 ‘여자들은 자기한테 애정을 가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굳이 해결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놓고 말로 풀고 있지. 아빠는 여자친구처럼 잘 들어주셔. 그의 무리가 언제나 계속될 수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이 시간을 즐기는 편이야.
네게 눈독 들이는 건 말 그대로 독 쓰는 태도야. 너를 만나는 데도, 내가 할 일을 하는데도 도움이 안돼. 신화에 대한 내 첫 책에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집중하고 있다면 나는 너를 향한 눈독을 거둘 수 있을까? 그리고 행복할까? 그 주제가 나에게 절실한 것이고, 글쓰기가 나의 천복과 통하는 것이라면 그 시간은 나에게 에너지 인출과정이 아니라 에너지 예입과정일테니 말이야. 그리고 글쓰기는 활쏘기랑 비슷하대잖아. 삶 전체가 조율되어야 하는 거니까 작업에 집중이 잘 되고 있다는 건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영양가 있고 생명력 있는 음식을 잘 챙겨먹고, 청소를 그럭저럭 하고, 좋은 이들과 어울리면서 하루를 잘 굴리고 있다는 말이겠지. 이번 1월 동안 초고를 어지간히 마치기로 마음 먹었지. 벌써 방학의 절반이 지났어. 두 달 동안 너에게 여덟 통의 편지를 썼구나. 그것 말고는 공쳤네. 글이 안되면 관련 책이라도 읽어야겠어. 오늘부터라도 부릉부릉 시동을 걸어야겠구나.
잘 지내고 있니? 우린 잘 지내고 있단다. 어제는 용산에서 중앙선 전철을 타고 운길산 역에 내려 수종사에 아빠랑 다녀왔거든. 절이 양지 발랐어. 물과 산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으면서 절로 가는 길이 좋았어. 초이선사와 다산선생이 차를 마시던 다원에서 차를 마셨고, 대웅전에서 108배를 같이 했어.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오른쪽에는 무명실과 기저귀감으로 쓰이는 소청 더미 위에 칠성이 모셔져 있었어. 둥글게 만나는 한강을 내려다보니 참 아름답더라. 500살된 은행나무 할머니를 친견했어. 은행나무 때문에 철 바꿔 그 절에 다시 가보고 싶어.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은행나무가 되고 싶어.
어제 출발할 때 꿈지럭거렸더니 다산선생 생가를 복원해 놓은 데는 가보지 못했어. 그 집은 유배지 강진에서 해배될 때, 복숭아뼈가 3번이나 구멍이 나도록 정진한 18년 동안 쓴 책 다섯수레를 싣고 올라온 다산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머문 곳이야. 아들 정학유가 산 곳이기도 해. 대신 쭈그리고 앉아서 장어를 구워먹었어. 혹시나 너를 초대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고 말이야. 미나리가 맛있었어. 다산초당에 야채를 심어기를 때 미나리를 꼭 가꾸라고 당부하는 걸 보고 재미있었는데 그게 그의 고향인 양수리에서 많이 가꾸는 것이었구나 싶었어. 길거리 간판에 ‘미나리전’ 이렇게 씌어있는 데가 여럿이더라.
아직은 ‘너’라고 부르고 우리가 미리 지어둔 태명으로 부르고 있지를 않지. 그 이름은 네가 오면 부를 생각이야. 지난 주에 마흔 넘어 결혼을 했으면서 아이 낳는 일에 집착하는게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어. 대략 둘러댔지. 며칠간 그 질문으로 내 안에서 골똘했단다.
어릴 때부터 결혼에 대한 꿈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꿈보다도 나는 아이에 대한 꿈이 늘 있었어. 다른 것은 그것을 잘 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내가 어머니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스물아홉살 때의 일이야. 미혼모가 될 자신이 없고, 소수자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결혼제도 안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어. 그러자니 결혼을 해야 했고, 결혼을 하자니 결혼과 사랑에 대한 나의 오래된 무섬증과 두드러기를 다뤄야 했어. 결혼기도를 한다, 배우자 편지를 쓴다, 가족세우기 웍샾에 쫒아다닌다 하면서 그 작업을 했지. 남들이 여러 번의 실전연애를 통해 점검한 것들이 전무한 상태이니 나이들어 배우려니 시간이 많이 걸렸지. 그건 모두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긍정하면서 만들어진 궤적이야. 나에게는 매우 강력한 동기유발이야. 나더러 너는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걸. 그건 내 안의 가장 강력한 욕망이다.
욕망을 다루는 법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두 마리의 소를 생각해. 한 마리는 십우도에 나오는 소이고, 또 한 마리는 인디언의 사냥법에 나오는 소야. 어떤 경우든 소한테 잘못 뎀비면 뿔에 받치고 발에 채이기 십상이다. 소 발자국을 보고 소를 찾으러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 소와 함께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게 십우도지. 절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그림이야. 인디언의 들소 사냥법은 들소를 절벽으로 모는 거야. 들소들은 눈이 옆에만 달려있고 앞 소의 궁뎅이만 보고 달리기 때문에 무리로 움직이다가 그냥 떨어지고 말지. 절벽 아래에서 들소를 줍는 거지. 욕망은 나에게 그 소 같은 거야. 강력한 힘이야.
모든 것은 변화해. 이건 진리야. 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적극적은 방식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거다. 이것처럼 내 안의 욕망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방식은 욕망을 긍정하고 그 욕망을 내가 원하는 삶의 에너지로 사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요즘 읽고 있던 정민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에 이런 글이 있어서 지침이 되었어. 닭은 치려면 계경을 쓰라는 부분과 격물치지의 공부법에 대한 부분이다.
네가 닭을 친다고 들었다. 양계는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양계에도 또한 우아하고 조속하고 맑고 탁한 차이가 있느니라. 능히 농서를 익히 읽어 좋은 방법을 가려 시험해 보도록 해라. 색깔별로 갈라도 보고, 횃대를 다르게도 해 보아라. 닭이 살지고 번식하는 것이 다른 집보다 나아야 한다. 또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기도 해야지.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이야말로 독서하는 사람의 양계니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못 보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모르면서 부지런히 애써 골몰하여 이웃 채마밭 노인과 아침저녁으로 다투는 것은 다만 세 집만 사는 작은 마을의 못난이의 양계일 것이니라. 네가 어떤 것을 편안해할 지 모르겠구나. 이왕 닭을 치려거든 백가서를 가져다가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차례를 매겨 <계경>을 짓도록 해라. 육우(당나라의 문인)의 <茶경>이나 유득궁의 <燃경>처럼 한다면 또한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속된 일을 하면서도 맑은 운치를 띠려면 모름지기 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삶을 바꾼 만남> 222쪽, <유아에게 부침>
다산의 두 아들은 계경을 짓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집에서 기르는 온갖 가축 사육에 관한 정보를 모두 정리해서 <종축회통>이란 두꺼운 책으로 묶었다고 한다. 또 나는 위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어. 격물치지의 공부법에 대한 다산의 편지야.
내가 수년 이래로 독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읽는다고 해도 안 읽은 것과 다름없다. 무릇 독서는 뜻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서 근원이 되는 뿌리를 얻어야 한다. 인하여 차례를 갖추어 글로 짓는 것을 날마다 일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다면 한 종류의 책을 읽어 곁으로 백 종류의 책을 살피는 것을 아울러 얻게 될 것이다. 인하여 본래 읽던 책의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꿰뚫어 알 수가 있게 될 터이니 이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사기>의 자객열전을 읽다가 조제를 올리고 길을 나섰다는 구절과 만났다고 치자. 조제가 뭐냐고 네가 스승에게 묻겠지. 스승은 남을 전별할 때 올리는 제사다 대답하시지. 그런데 굳이 조(祖)라고 한 이유가 무어냐고 너는 묻겠지. 스승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뒤에 집에 돌아와 사전에서 조자의 본뜻을 살펴보고 또 사전을 바탕으로 다른 책에까지 옮겨가서 그 뜻풀이를 살펴 뿌리를 캐고 지엽을 주워 모으도록 해라. 또 <통전><통지><통고> 같은 책을 보며 조제의 예법을 검토해서 차례를 매겨 책을 만든다면 썩지 않을 책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전에는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도 모르던 네가 이날부터 엄연히 조제의 내력에 대해 훤히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비록 큰 학자나 거유(儒)라 할지라도 조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너와 겨루지 못할 것이니 어찌 크게 즐겁지 않겠느냐. 주자의 격물 공부도 단지 이와 같았을 뿐이다. 오늘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하는 것도 모름지기 이처럼 해서 시작하게 된다. 격(格)이란 것은 밑바닥까지 끝장을 본다는 뜻이다. 밑바닥까지 끝장을 보지 않는다면 또한 아무런 보탬이 없게 된다. (같은 책 230쪽)
어차피 누가 말리거나 비판하더라도 나는 살짝살짝 숨어서 웹써핑을 하는 방식으로라도 노력과 관심을 경주할테니 난임부부로서 이왕이면 야무지고 알차게 공부했으면 싶다. 태교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게 좀 더 허용적이 되기로 했다.
네가 오기 전에 쓰는 이 편지질도 재미있구나. 잘 있어. 이만 줄인다.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엄마가
Ps.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그리고 기도를 들으시고, 저희를 지켜보고 보호해주시는 모든 고운님 들께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아직 만나기 전에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어제 올라간 수종사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아침에 쓸어놓은 빗자루 자국이었어요. 예불을 마치고 산사에서 비질을 한 후 하루를 맞이하고, 이불호청을 빨고 머리를 단정히 깍고 새해를 맞이하듯 저도 묵은 것을 청소함으로써 새 것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싶습니다.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것들을 바로 놓을 수 있기를, 미뤄두었던 일들을 마무리짓고, 보낼 것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를 보호하여 주시길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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