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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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일이 많다. 일이 많다기 보다는 온전한 내 생활이 없다. 뭔가에 쫗기듯 여유가 없다. 회사일, 시험준비, 변경영과제의 삼단콤보가 일년째 내 발목을 잡고있다.
회사는 전략과제를 하게되서 부서가 비상이 걸렸다. 왜 매번 일을 이렇게 급하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24시간 풀가동체계를 위해서 2교대를 한다는 소문이 있다. 혁신, 창의를 외치는 글로벌 기업의 모습이다. 벌써부터 설날에 출근을 하네마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보니 머리가 아프다.
2년째 공부중인 시험은 이제 마지막 기회다. 붙든 떨어지든 둘중 하나이다. 시험을 대비하여 얼마전부터는 주말 스터디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출석을 못했다. 다른 사람보다 뒤쳐지는 것같아 답답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딱히 해결방법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변경영 과제로 일주일에 읽어야 하는 책은 그냥 부담스럽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좋은 책들을 소개받는 것과 별개로 일주일의 한권을 책을 읽는다는게 쉽지가 않았다. 지금 한가롭게 책에 집중하기에는 사치스런 기분이 들었다. 변경영 과제에 점점 소훌해지는 나에게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싶은 모양새다.
그러다가 최근에 아버지가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을 알게된 것은 연말이였는데, 친척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왜 이런 소식을 외숙모에게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서, 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은 바쁜데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이게 그럴 문제인가. 뭐하러 고생해서 자식을 키웠냐. 우리가 그런 사이였냐면서 따지듯 물어보았다.
아마 아버지의 위가 이상하다는 진단을 받은건 내 결혼식 전이였던 모양이다. 경사를 앞두고 불길한 징조에 대해 가타부타 하고 싶지 않으셨던지 크게 내색을 안하신 모양인데, 결혼식도 끝나고 암확진 판정도 나왔는데 왜 숨기셨는지 화가났다. 그리고 내가 바빠서 걱정끼치기 싫었다는 답변을 들으니 조금 화가 났다. 그러니깐 바쁜척 하고 살았던 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아버지 때문에 주말마다 광주에 갔다. 월차도 냈다. 요즘 위암 수술이 별거 아니라고 하시지만 당장 장인어른이 위암으로 돌아가신게 2년전이다. 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신경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일년에 광주에 와본게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번주 다행히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위를 거의 잘라냈지만항암치료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수술이 끝나고 옆에서 계속 아버지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엄마와 쉴새 없이 덕담을 해주는 누나처럼은 하지 못하겠어서 몰래 병원비를 계산했다. 바쁜척 하고 살았던 사죄의 의미로 이게 가장 무난해 보였다.
아버지는 수술 이후로 자주 얘기하신다. 일보다 건강이 우선이라고. 건강에 신경쓰라고. 하지만 그걸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다. 내가 바쁜게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난 열심히 사는 것인가. 열심히 사는 척 하는건가. 아니면 아버지 말처럼, 내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일까.
바쁘다는게 이제 조금 짜증이 났다. 분명 내가 잡고 있는 뭔가 하나를 버려야 해결이 날 것 같은데, 그 결정을 쉽게 할수가 없다. 스스로 다그치거나 정신력으로 버티기에 너무 오래 끌어왔다. 이도저도 아닌 이런 상태가 계속 지내다보니 지금 내가 뭐하고 사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러다가 이틀전 사고가 났다. 친구 아버님 부고 소식을 듣고 상가집에 다녀오는 길에 차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가 난 저녁, 경찰도 오고 보험사끼리 대충 합의를 하고 끝난줄 알았는데, 토요일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상대편에서 사고 접수를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한 모양이다.
토요일에 출근했다는 것도, 스터디 모임 못가는 것도, 읽어야 할 어려운 책이 있다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복잡한 사고 처리까지 해야 한다니 밑에서부터 뭔가 부글부글 끊어올랐다. 벌점으로 면허정지가 될 수 있다고 경찰관 말에 머리속에서 펑 소리가 났다. 사건 자체는 별거 없는데, 경찰서도 가야하고 정비소도 가야하고 그냥 필요없는 귀찮은 일들이 생기니 화가났다. ‘날 좀 귀찮게 하지 말어, 지금도 충분히 바쁘다고’라고 계속 되내였다.
그 멀쩡한 사람은 왜 입원을 한 것인지, 도대체 왜 지금와서 말을 바꾼 것인지 생각할 수록 분했다. 블랙박스를 달지 않은 것도, 사고날 저녁 녹취를 하지 않은 것도 후회가 되었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도처에 사기꾼과 기회주의자가 넘쳐나는 것을 내가 또 깜박한 것이다.
토요일 주말, 회사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와서 남아있던 장자책을 읽기 시작했다. 경찰서에서 받은 전화가 아직까지 진정이 안되는 것도,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것도 답답한데 장자책은 더 답답할 뿐이였다. 책을 읽으면서 울림은 없고, 조급함만 느꼈다.
그리고 그날따라 억지로 책을 읽어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자유롭지도 않고, 자유로울 준비도 안되어 있으면서 장자를 읽는다는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읽는 중간중간 책을 덮고 바쁘게 산다는 것, 자유롭지 못한 내 상황을 떠올렸다.
언제 난 느긋하게 장자를 읽을 수 있을까. 그가 말했던 도에 이르는 길. 사사로운 것에 신경쓰지 않고, 소탈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혼자 빨리 가기보다는 함께 멀리가는 그의 삶의 모습을 언제 이해할 수 있을까
나도 그처럼 히피스럽게 살고 싶다. 대범한 사람이 되고싶다. 작은 것, 소소한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오늘 저녁 침대에 들면서 그와 만나는 꿈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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