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관은 풍산이며, 파는 참궁공파로 시조 류절 할아버지의 24대손이다. 풍산 류가 집성촌인 하회마을에 가면 아제, 아지매라고 부르는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순신과 절친하게 지냈던 류성룡 할아버지를 기리는 기념관과 그가 살았던 충효당과 그의 형이 살았던 양진당이 마주보며 잘 보존되어 있다. 집안 항렬로 따지면 어찌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류성룡 할아버지 집안과 우리집안은 친척이다.
나는 어렸을 때 하회마을이 그렇게 유명한 곳이지, 서애 류성룡 할아버지가 어떻게 훌륭하신 분이지 몰랐다. 다만 류성룡 할아버지는 동시에 3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만 듣고 자랐다. 손으로 글을 쓰면서 귀로는 또 다른 보고를 들었고 동시에 말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동시에 3가지를 한꺼번에 한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워했고 ‘영의정’이라고 하면 신하로써 가장 높은 자리인데 우리 집안 조상 중에 영의정을 한 훌륭한 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가슴 뿌듯해 했다.
안동을 가면 늘 들르는 곳이지만 작년 봄 시축제 답사여행에도 아제네 집에 들러 대청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고 초가 끝으로 모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마을을 둘러 보았었다. 그때도 자세한 역사적 배경보다는 유명한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만 다녔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이순신이 의지하고 마음을 편히 편지를 주고 받고 꿈속에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하회마을과 류성룡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류성룡 할아버지는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으로 1542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태몽은 한 마리의 이무기가 나타나 ‘부인, 내 꼬리를 한 번만 쳐 주시오. 그러면 나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를 수 있소.’ 하여 꼬리를 치자 찬란한 빛을 발하며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그 꿈을 따 성룡이라 이를 지었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면서도 글공부에 열중했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21살 되던 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임진왜란 발발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다가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때 이순신을 수군 대장으로 등용시켜 바다를 지키게 하고 권율 장군을 발탁하여 행주산성을 지키게 하였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하였으며,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해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 되었으나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와 조용히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선조 40년에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