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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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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6일 07시 11분 등록

물길은 그냥 흐르지 않았다

안개 같은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산과 강의 경계가 다시 열리고, 그 사이로 길이 보였다. 잘 다녀오라는 아니 잘 가라는 인사조차 없이, 산허리를 감아 돌고 난 물길은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온 길이었다. 정선까지는 된 걸음으로 오십리 길이다. 때로 강을 끼고 걷는 길은 위험하였다. 가까이 두고 보려는 욕심에 철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지나는 차들에 등을 보일 때도 있다. 짐승같이 으르렁 대는 소리가 뒤통수에 달라붙기 시작하면, 빨려들 것만 같은 바람이 바로 곁에서 스쳐 갔다. 그리곤 매캐한 뒷 냄새가 따라 붙곤 하였다. 차들은 강물보다 빨랐다. 지나는 사람이 있어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무엇이.. 또 얼마나 바쁘게 살기에 제 발로 가는 걸음보다 앞질러 가려고 저리들 달리는 걸까. 물길 위에 목숨을 맡기고 열흘이고 보름이고 흐르던 정선아리랑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낯선 인기척에 놀란 왜가리 하나가 강물에 제 그림자를 비춰 날며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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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을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버스 한 대가 길을 막아섰다. 다가가 보니 태백산 적멸보궁이라는 정암사에서 나온 차였다. 얼핏 상춘객으로 보였던 아낙들이 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가볍게 건넨 말인사가 자꾸 발걸음을 잡았다. 처음에는 막걸리만 한 잔 하라더니, 떡이며 밥을 퍼내었다. 쪼그리고 앉았던 엉덩이가 결국 주저앉고야 말았다. 아이 셋은 낳아야 보내 줄 모양이다. 내일 모레 부처님 오신 날 쓰려고 쑥을 깨러 나온 보살님들이었다. 옥수수로 빚은 막걸리는 더 단맛이 났다. 자꾸만 권해오는 술잔을 한 잔만, 딱 한 잔만 더 하다가 결국 병 하나를 다 비웠다. 날이 참 좋았다. 정선으로 가는 42번 국도 옆에서 꽃이 피어났다. 가로수로 심겨진 자작나무가 연한 초록빛으로 조잘대기 시작했고, 동박꽃은 점점 시들어 가는데 옥수수 막걸리처럼 노란 봄이 여기저기 피었다. 슬금슬금 바람 끝에서 젖은 비린내가 묻어났다.

정선으로 들어가는 물길은 그냥 흐르지 않았다. 왼편으로 멀리 상정바위 품안으로 안겨들었다가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는 산줄기를 감고 돌아 바삐 달려왔던 숨을 죽였다. 길은 그 물을 따라 엇비스듬히 놓였고, 급한 철길은 총알이 지난 것 같은 구멍을 내었다.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느릅나무 한 그루가 다리목에서 강을 굽어보고 있다. 주인도 없는 빈 집 마당에 개들 짖는 소리만 남아 걸음을 뒤쫓아 왔다. 계곡을 울린다. 가시달린 엄나무가 대처먹기 딱 좋을만큼 순을 키워놓았다. 지난 해 옥수수를 심었던 밭은 때가 다 지나는데도 그대로다. 밭 언저리 너머로 봉우리 모양을 닮은 쌍무덤이 놓였다. 하나도 아니고, 둘인데 하나처럼 이어졌다. 죽어서마저 같이 눕고 싶었던 것일까. 혹 죽어서나마 함께 하고 싶었던 삶은 아니었을까. 골진 처녀가슴처럼 설레이게 봉긋하였다. 밭 돌다리길과 송오다래길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자 멀리 정선 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서 경운기 하나가 더딘 걸음으로 방금 지나온 고갯길을 올라 온다. 꼬리를 물었던 트럭 하나가 조바심을 내더니만 기어이는 앞을 질러간다. 쌔한 매연이 경운기 위에 고랑진 노인의 주름살을 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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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에서 흘러온 강물을 사람들은 조양강朝陽江이라고 불렀다. 인적 드문 골짜기를 돌아올 적엔 소리도 없던 강이 널찍이 가슴을 펼쳐놓고서 자갈 굴리는 소리를 내었다. 조양강을 끼고 정선 읍내는 둘로 나뉘었다. 정선역이 있는 건너편은 약초시장과 아라리촌 그리고 새로 지은 경기장이 있고, 안쪽으로 군청과 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발치 아래로 작은 다리가 하나 가로 놓여있고, 둔치를 따라 축구장들이 보였다. 제방 안쪽으로 간간이 주황색, 파랑색 지붕들이 납작 엎드려 저녁을 기다리고 있다. 멀찌감치 아파트 하나가 솟아 보였다. 하늘너머 겹겹이 산봉우리들이 멀수록 희미하고, 가까울수록 짙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가 오려나 보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 걸어 주는 걸음조차 없는 낯선 땅이지만, 귀에 익은 이름 하나 적힌 플랙카드가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늘처럼 모시겠다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했다. 얼마 전 선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은 하나로 흐르는데, 사람들은 편을 가르고 산다. 강은 아래로 갈수록 모이는데, 사람들은 위로 올라야만 모여든다. 강은 흐를수록 깊어지는데,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말이 많아진다. 물은 깊어질수록 속으로 우는데, 사람들은 눈물없는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것은 듣지도 못한다. 말하지 않는 것은 알지도 못하였다. 골이 깊을수록 물은 마르지 않는데,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부엉이 바위 절벽 아래로 내몰린 죽음 하나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에서 맴을 돌더니 억지로 다리 하나를 건너고 나서야 조금 홀가분해졌다. 내일은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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