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 조회 수 2303
- 댓글 수 1
- 추천 수 0
얼른와요! 여가 장터래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저녁 아라리촌에서 먹은 곤드레나물밥 한 그릇에 푸진 인심이 아직 든든한 것인지, 옥수수 막걸리에 취한 탓인지 배고픈 줄 몰랐다. 넓은 여관방 한 구석에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 젖은 창문 밖으로 비가 오는 걸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제법 오래된 낡은 창문 틀 위에서 빗물이 맺혀 뚝! 뚝! 방울진다. 세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발정난 나귀 울음 같은 경운기 소리도 들리고, 지나는 걸음 불러 세우는 고함소리며, 부침개 지지는 냄새가 번져들자 몸에 허기가 들었다.
허생원이랑 조선달 일행도 왔을까. 산허리에 걸린 기나 긴 길을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를 들으며, 가스러진 목뒤 털을 하고 눈곱을 개진개진 흘리던 나귀도 아직 살아 있을까. 험하고 입벌리기도 대근하다던 그 둔덕길을 넘어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던 산길들을 돌고 돌아서..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히던 메밀밭.. 아.. 아직 때가 이르구나. 아니구나. 평생을 그리던 성서방네 처녀를 다시 만났다면, 대화 어디쯤에 전방이라도 하나 차렸을 법하다. 얼금뱅이 허생원을 등에 업고 달빛 찬 강물을 건너던 왼손잡이 동이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애비도 모르고, 성도 없이 그저 동이라고만 했지...
주섬주섬 옷가지를 주워 꿰고서 몇 걸음을 나서자 저잣거리는 온통 더덕냄새로 숨이 막혔다. 굴비대신 개두릅, 참두릅이 꾸러미로 엵어지고, 맛보기로 건네주는 인절미 찰진 인심에 발이 묶였다. 엿장수 가윗소리가 흥을 돋구고, 손바닥 반만하게 접어낸 수수찰떡이며 배추잎 넓적하게 부쳐낸 메밀전에 군침이 돌았다. 해장인지 점심인지도 모를 걸음들이 저잣거리 곳곳에 앉았고, 잘 말린 곤드레.. 취나물이 널려 있었다. 노란 올챙이들이 그득그득 담긴 먹자골목은 이미 발딛기조차 쉽지 않았다. 닷새 전에도 보았을 얼굴들인데, 무슨 할 말들이 많은지 골짜기 골짜기 숨겨있던 이야기들이 강줄기를 따라 장터로 흘러들었다. 흥이 넘쳤다. 까짓 가랑비야 내리라지 뭐... 이미 술에 젖어 농익은 마음에 궂은 비도 더는 몸을 적시지 못하였다. 기껏 반시간이면 다 돌아볼 장터를 벌써 몇 번째 맴도는 지 기억이 없다. 동이는 끝내 보이질 않았다.
무정한 것이 사람이라면, 무심한 것은 세월인가 보다. 한번 흘러가 버린 물이 되돌아 흐른 적이 있던가. 그런 줄 알면서도 둘 곳 없는 마음은 또 물길을 쫒는다. 장터 한 구석에서 젊은 이모의 농익은 안주를 막걸리 두어 잔에 섞어 마시고서 등짐을 다시 메었다. 멀리 큰 걸음으로 읍내를 에둘러 돌던 강물을 생각해냈다. 밤새 얼마를 또 울었을까. 정선병원이 멀리 보이는 다리목부터 팔십리가 조금 더 되는 길이다. 오늘 하루 얼마쯤이나 가게 될까 궁리해보다 이내 바보같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몇 백 미터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나무그늘에 주저 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