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강훈
  • 조회 수 3433
  • 댓글 수 9
  • 추천 수 0
2011년 8월 19일 11시 47분 등록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로

나무뿌리 까치발로 세상에 고개를 내밀듯

내 무딘 감각의 두꺼운 송판 위로

바람과 인사하러 눈물로 흐르는 것은 자유였다.

 

정의되지 않은 지난 시간들이

한번도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을 맞을 것처럼

루카의 성곽위로 두발 동그라미를 굴리며

나를 스치는 것은 바람이 아닌 날개의 노래

 

열 시 방향에서 흐르는 아침 햇살을

초록의 이파리가 브런치를 먹는 느긋함으로 반짝이고

뻔히 아는 삶의 비의를 먼 곳까지 찾으러 왔다고

재잘거리는 수런거림이 가벼이 웃음을 보낸다.

 

파랑과 하양이 신묘하게 어우러진 그날의 하늘을 보며

오늘이 며칠인가 농밀한 현실감이 낯설게 어색하고

흐릿하게 수줍은 웃음 하나

마음의 배면에 그리움을 수 놓고 바람에 탕진 당한다.

 

여행은 어땠느냐고.....

바람이 분다.

그 기분 꽤 괜찮다고.....

빙그레 웃는다.

 

<2011 814일 루카의 성곽을 지나는 아침에>

 

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여행은 시를 쓰게 했다.

마음의 묘한 무늬가 사랑으로 중첩되고, 설렘으로 얽혀 들고 다시금 일상으로 해체되었다.

여행은 열두 폭 병풍처럼 현실을 가리고 나를 호위했지만 나의 일상은 더욱 도드라짐으로 삶을 그립게 했다. 낯선 풍광들이 끊임없이 눈과 마음에 놀람으로 들어오지만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듯 가벼움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중한 일상들이 깨끗한 얼굴로 현실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낯선 감정과 소중한 일상들의 변주가 마음에서 시로 노래하고 있었다.

 

보고 싶은 것 이상을 보았다.

세상에는 오직 마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피렌체에서 무수한 조각과 그림들을 만났다. 며칠이 지나지 않은 지금 각각의 이름과 얽힌 일화들이 벌써부터 가물거리지만 우피치 미술관 앞의 코시모가 내민 왼손이 위안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것은 오직 나와 대상과의 관계에서만 발현되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대상에 몰입하고 그 대상 앞에서 근근한 나의 생이 겸허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내 마음 때문에 존재했던 순간이었다.

 

서울의 달과 루카의 달은 같은 달이지만 투란도트의 아리아가 울릴 때 나의 마음으로 흐르는 것은 단순한 달빛이 아니라 생의 무대 전체에 불어주는 삶의 환기였다. 오랜 장마의 끝자리에서 풀 먹인 이불 위에 드러눕는 상쾌함처럼 눅눅한 생의 숨구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일정의 피곤함은 졸음과 함께 이완되고, 삶의 경직은 루카의 달빛 아래에서 무딘 마음을 풀어 놓는다. 이 순간 감정은 충복된다.

 

여행은 차곡차곡 쌓인 상처와 애정들을 들추게 했다.

감춰야 안전할 것만 같았던 삶의 상처들은 여행과 만남을 통하여 드러내도 무고하다는 사실을 확인케 했으며 상처만을 상상하며 자책했던 지난 시간을 부축했다.

더불어 일상에 묻혀서 제 얼굴이 일그러진 줄 몰랐던 사랑은 진실을 포착한 탐정처럼 두 눈을 반짝거리며 생생함으로 다가왔다.

상처와 사랑은 마음 속에서 서로 내왕하며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더욱 명징케 했다.

 

여행을 하는 시간을 통해서 함께한 벗들을 통해서 내 안에 갖가지로 있는 또 다른 나의 얼굴과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감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대단한 무언가를 찾아보겠다는 마음을 한 켠에 두고 떠난 길이었지만 돌아오는 길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나의 일상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일렬로 줄지어 서게 하고 그것 하나하나의 얼굴을 확인하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분하게 하는 지혜를 얻었다.

감사하는 시간이었고, 그리워할 생의 한 대목임에 틀림없다.

그림1.jpg

IP *.163.164.178

프로필 이미지
우산
2011.08.19 18:24:05 *.76.171.78

늑대의 이탈리아 사진을 다운 받아 놨다니
한잔 걸치고 온 남편은 슬라이드로 다 보고 들어가 잡니다
왜 우리 마누라 사진은 없는거야? 한마디 하네요..ㅎㅎ

내가 피한거야.
이탈리아를 내 몸구석구석 담느라 내 모습이 안보였을거야..
라고 했지요..

아내가 참 예쁘더이다.. 전해 주세요..ㅎㅎ

루까가 주었던 편안함
남편에게도 600유로씩 몇달만 내줄수 있어?라고 물었는데 답은 없어요..

구선생님도 시를 쓰고 싶어하시는듯한데
늑대도 시인이 된듯 하구려.


프로필 이미지
강훈
2011.08.21 07:25:18 *.69.251.200
경치에 취하고, 감흥에 취하다보니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다보니 우산님을 담지 못했나봅니다.
아마도 '여기 찍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 위주로 찍게 되지 않았나...

우산님은 여행 중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보고
이것 저것 챙기시는 '초능력'을 보고 나에게 없는 그 절대 능력을 부러워했습니다.

편안한 날들 되시고. 간간히 뵐 수 있기를...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1.08.20 01:33:10 *.75.194.69
훈사노바 이제 강작가님 다 되셨군요 ^^ 
사랑을 알고 나니 그 전의 세상이 아니더라는 말이 
왜 오빠의 시를 읽고나니 떠오를까 
아직도 써니 줄리엣이 로미오~~라고 부르는 장면이 눈에 선한데 ㅎㅎ
원래도 깊었지만 그 위에 하얀 생크림을 얹어 놓은듯 부드러움까지 더하니 
한층 더 풍미가 깊어진듯 해요
아우~~~ 외로운 늑대에서 행복한 늑대로 아우~~~
프로필 이미지
강훈
2011.08.21 07:28:22 *.69.251.200
사샤의 매력은 여행 전에도 훌륭했지만
여행 중에 너의 밝음에 대한 매력을 더욱 많이 느낀듯
너의 매력이 좋은 글과 좋은 그림과 좋은 음악을 만나
꽃처럼 피어날 것을 나는 이~~~~를리에서 본듯하다.
프로필 이미지
2011.08.20 12:07:05 *.128.229.239

그렇지
여행은 시를 쓰게 하지
시로 기록하게 하지
프로필 이미지
강훈
2011.08.21 07:31:35 *.69.251.200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때
나는 왜 살고 싶은 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때>
 
여행에서의 느낌이 이러했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유재경
2011.08.20 14:17:17 *.143.156.74
공항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오빠 얼굴에 어찌나 밝던지 정말 가족을 보고 싶어 했구나 싶더군요.
이제 바로 내 옆에 있는 진짜 소중한 것들을 뜨겁게 사랑해줘야 할때인듯 싶네요.
프로필 이미지
강훈
2011.08.21 07:35:47 *.69.251.200
나에게 여행은 항상 그랬다.
만족하지 못한 일상이 심각하게 했고, 무거웠고, 즐기지 못했고.
일상을 뒤엎을 무언가를 찾느라 어깨와 머리가 묵직했는데....

이번 여행은 많이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상이 그리웠고, 돌아가면 더욱 풍성해질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일상의 행복을 조금씩 느낀 보람인듯 했다.

더불어 노는 맛이 참 좋았다. 그립다.  
프로필 이미지
루미
2011.08.22 20:59:24 *.23.188.173
이번에는 시인이라...
다음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놀래켜 줄 건가요?
훈사노바의 열일곱순이는 오라버니에게 열 일곱가지의 모습을 줬나보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592 길이 끝나는 곳에서 -1 [2] 백산 2011.09.04 2086
2591 응애 78 - 내 청춘이 지나가네 file [10] 범해 좌경숙 2011.08.28 3101
2590 단상(斷想) 78 - Ciao file [4] 書元 2011.08.28 2351
2589 응애 77 -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6] 범해 좌경숙 2011.08.25 2919
2588 응애 76 - 쌍코피 르네상스 [20] 범해 좌경숙 2011.08.23 8470
2587 이탈리아 [12] 루미 2011.08.22 1922
2586 La Dolce Vita. 달콤한 인생 [11] 미나 2011.08.22 2304
2585 나비의 이탈리아 여행기 No.3 - 볼로냐, 사부님 실종 사건 file [10] 유재경 2011.08.22 4533
2584 나비의 이탈리아 여행기 No.2 - 베로나에서는 누구든 사랑에 빠진다 file [8] 유재경 2011.08.22 4430
2583 단상(斷想) 77 - 두 바퀴로 세상을 굴린다는 것 file [2] 書元 2011.08.21 2341
2582 성공 키워드 아줌마를 보라 - 4. Homo Hundred 전초전의 승자는 書元 2011.08.21 2749
2581 [08] 삶이 축복일까? [5] 최우성 2011.08.21 2305
2580 [Sasha] Becoming Renaissance Woman (1) file [10] 사샤 2011.08.20 2200
2579 이탈리아 여행이 나에게 말해준 것 file [9] 미선 2011.08.19 2456
» [늑대19] 여행에 대한 감사의 마음 file [9] 강훈 2011.08.19 3433
2577 나비의 이탈리아 여행기 No. 1 file [14] 유재경 2011.08.19 4740
2576 2011년, 신치의 이탈리아 여행 [12] 미나 2011.08.18 2573
2575 옆에 있는 사람도 사랑 못하는데 누굴 사랑해? file [17] 양경수 2011.08.17 3341
2574 생태조사 보고서 [1] 신진철 2011.08.10 2620
2573 단상(斷想) 76 - 보수과정 file [2] 書元 2011.08.06 2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