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선
- 조회 수 2455
- 댓글 수 9
- 추천 수 0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늘 바라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과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이번 여행은 이 두 가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가지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와이너리에서 난생처음 술이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 와인을 만나게 된 순간 주량을 넘어선 것도 잊은 채 남아있는 시음용 와인을 다 마셔버렸던 그때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즐겼던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워낙 주량도 약하지만 술 마시면 빨개지는 내 얼굴이 싫었고 그런 모습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더 싫어해 웬만해서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이런 내가 와인을 마시고 숙취에 고생을 했으면서도 다시 한 번 낮술을 마시고 피사의 사탑 그늘아래서 낮잠을 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타인을 의식하는 안테나를 없애버리는 것보다 순간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장소에 동화되어 충실히 즐기기를 원한다면 틀을 벗어버리고 그곳의 풍경에 물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매 순간 순간 스스로를 물들일 수 있다면 어찌 삶이 빛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짧은 머리가 신경 쓰이지 않았던 그곳에서 필요했던 것은 용기였다. 그렇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이번 여행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결국 필요했던 것은 할 수 있다는, 한 번 해보자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다짐하는 거창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다독여 주는 ‘괜찮다.’ 라고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의 작품들은 르네상스는 사람이 움직임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든 중심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몇몇 그림은 방향을 달리해서 바라보아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가 움직여서 보지 않는다면 그런 그림이라는 것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그림들은 단지 화가의 천재적 능력으로 인해서만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겠다는 화가들의 의지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세대를 거슬러 몇 백 년 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걸작들이 나오게 해주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도를 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시오노 나나미는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 바로 그것이 나중에 후세인들이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된 정신운동의 본질이었다고 말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자 하는 마음을 표출한다는 것,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시도해 보는 것 바탕에도 역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 작은 용기로 인해 피렌체 도시 곳곳이 위대한 컨텐츠로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나를 던질 자신이 없었기에 안전하고 쉬운 지름길을 발견해서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 길을 따라가면 편하고 쉬울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삶이 줄 수 있는 즐거움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며 더할 나위 없이 무미건조한 삶에 질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색깔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런 길을 찾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용기 내어 한 발 내딛어야만 나만의 르네상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피치 미술관의 그림들은 말해주고 있었다.
이탈리아 하면 먼저 패션의 도시 밀라노와 성베드로 성당이 자리 잡고 있는 로마, 수상도시 베네치아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밀라노는 휴가로 한산한 거리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패션니스트도 잘생긴 이탈리아 총각도 볼 수 없었고 로마와 베네치아는 이번 여행에는 빠져있었음에도 방문한 각기 다른 색깔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지역 하나하나에서 꾸미지 않아도 그대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나만의 매력을 표출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람은 각각의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의 매력이 더 좋아 보여 내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 너무 실망할 것 같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던 과거를 넘어서 이제는 나만의 색깔을 표출해도 괜찮다는 것을 이번 여행이 알려 준 것이다. 와이너리에서 낮술에 취해 얼굴색이 토마토가 되어 해롱거리면서도 깔깔거렸던 순간과 무덤덤하게 사랑얘기를 할 때 비추던 아씨시의 밝은 달빛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젠 이탈리아에서 짧지만 뜨거운 여름을 보냈던 것처럼 10월 가을의 어느 멋진 날을 기대해본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http://www.youtube.com/watch?v=3ybnFRjeqw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