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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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8일 월요일 아침, 시르미오네 부근의 브레시아 EST호텔에서 서둘러 짐을 챙겨 버스에 오른다. 사랑의 도시 베로나로 향하는 길, 사샤의 분위기 있는 시낭송으로 하루가 열린다. 정호승 시인의 ‘결혼에 대하여’를 들으며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결혼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본다. 베로나에 대해서 사부님과 알렌의 설명이 이어진다. 로이스의 지인인 알렌은 이번 여행의 가이드를 자청해 휴가를 내고 뉴욕에서 이탈리아로 날아왔다. 자신을 ‘르네상스 맨’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알고 싶고,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르네상스적 욕구로 똘똘 뭉친 사나이다. 한국에서도 수 해 동안 근무한 적이 있어 사람들이 집중하지 않을 땐 ‘여기요’라고 우리를 불러 웃음 짓게 했다. 출장 차 이탈리아에 자주 왔었다는 그는 각 도시의 역사, 지리, 문화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어 내가 준비한 ‘스페셜 이벤트-로미오와 줄리엣 명대사 따라 하기’가 시작되었다. ‘아, 로미오, 로미오. 왜 그대의 이름이 로미오인가요?’로 시작되는 사랑의 대화를 연기해보는 것이다. 외국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해 온 핸드폰 액세서리를 우승자 상품으로 내걸었고 사부님 외 몇몇 분들이 10유로씩을 보태주어 상금 30유로가 모였다. 우선 이번 여행에 부부동반으로 참여한 네 커플에게 참석을 종용했다. 승호-보나 커플이 수줍게 나오더니 남녀 역할을 바꿔 코믹하게 소화해낸다. 이어 부부관계가 아니어도 참석이 가능하자고 하자 써니-강훈 커플의 신들린 닭살 연기가 이어진다. 써니 언니가 강훈 오빠의 절벽 가슴에 안기어 코맹맹이 소리로 로미오를 불러댄다. 모두가 그 모습에 경악한다. 이어 최연소 부부인 경인-보라 커플의 어색한 연기가 펼쳐지고 김하수님-이정숙님 부부와 슬미 아버님-어머님께서 참여해 주셨다. 그렇게 모두가 한바탕 유쾌하게 웃으며 이벤트를 즐기는 동안 버스는 벌써 우리를 베로나에 내려 놓았다.
베네토 주에 위치하고 있는 베로나는 아름다운 아디제 강을 품고 있다. 붉은 빛이 도는 벽돌로 지은 집들이 아기자기하고 멋스러운데, 이 곳에서라면 누구든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베길 수 없을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베로나 성 안쪽으로 향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황제파(기벨린)와 교황파(구엘프)로 나누어 갈등을 겪었다. 알렌의 설명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성 양식에 따라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베로나 성은 성곽 모양이 제비 꼬리를 닮아 황제파를 지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 벽에 로마의 건국 시조인 늑대 젖을 먹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동상도 보인다. 베로나는 로마 황제의 휴양지였기 때문에 로마 양식의 건축물들도 감상할 수 있다. 우선 1세기에 지어졌다는 로마시대 양식의 원형경기장인 아레나를 둘러본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이 보이는데 아직도 이곳에서는 매년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수 천명이 한꺼번에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이 곳은 어느 자리에 앉아도 동일한 음향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고 하니 놀랍다. 광장에는 고대 로마 전사나 이집트 파라오 등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관광객을 유혹한다. 오페라 <아이다>의 주인공 복장을 한 남녀와 단체 사진을 찍었다.
걸어서 베로나 광장에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물건을 파는 벼룩시장과 보기만 해도 머물고 싶어지는 예쁜 집들이 우리를 맞아준다. 이탈리아의 집들은 대부분 발코니를 가지고 있다. 그 발코니에는 주황색 화분이 놓여 있고 그 화분에는 베고니아와 같은 화려한 색깔의 꽃들이 한껏 아름다움을 뽐낸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가 구부러진 등으로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이 참 정겹다. 베로나의 영주였던 스칼리제레가의 성이었던 카스텔베키오를 잠깐 돌아보고 아디제 강을 따라 도시를 산책한다. 그리고 현지인 가이드를 만나 로미오의 집으로 향했다. 현재 개인 소유이기 때문에 집안을 둘러 볼 수는 없어 외관만 구경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문 오른쪽에 걸려 있는 대리석 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O, WHERE IS ROMEO?
TVT, I HAVE LOST MYSELF, I AM NOT HERE.
THIS IS NOW ROMEO, HE’S SOME OTHER WHERE.
(SHAKESPEARE, “ROMEO AND JVLIET, ATTO I, SCENA I)
도착한 줄리엣의 집은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여진 사랑의 낙서가 가득하다.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 등장했던 줄리엣의 비서는 찾아볼 수 없어 서운했지만 벽을 메운 수많은 사랑의 사연들만은 변함이 없다. 티켓을 사서 줄리엣의 집으로 올라가본다. 좁은 나무 계단을 지나 2층에 오르니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림과 영화의 주인공들이 입었을 듯싶은 의상과 소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곳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발코니에서 줄리엣이 되어 로미오의 이름을 보는 것. 줄리엣이 되고 싶은 여인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집 마당에서 올려다 보면 발코니는 높이도 꽤 높고 로미오가 잡고 올라갔을 만한 나무 등걸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로미오와 줄리엣은 허구일 뿐이지.
그런데 왜 줄리엣의 집이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로미오의 가문 몬테규 가와 줄리엣의 가문 카퓰렛 가의 싸움을 중재하는 사람이 베로나의 왕자 에스카루스이다. 베로나 시는 세계인이 다 아는 소설의 무대라는 점을 관광산업에 십분 활용해 시내에 줄리엣의 집, 로미오의 집, 줄리엣의 무덤 등을 지정했다. 20세기 초에 임의로 지정한 것으로 실제 무대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줄리엣의 집은 베로나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집 마당에는 줄리엣의 동상이 서 있다.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에 동상의 그 곳만 사람들의 손길로 반질반질하다. 줄리엣 동상 오른쪽에 로미오의 집 앞에 있던 같은 양식의 대리석판이 보인다. 이렇게 쓰여있다.
“BVT, SOFT! WHAT LIGHT THROVGH YONDER WINDOW BREAKS
IT IS THE EAST, AND JVLIET IS THE SVN!
………………………………………………………………….
IT IS MY LADY. O, IT IS MY LOVE!”
(SHAKESPEARE, “ROMEO AND JVLIET”, ATTO II, SCENA II)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며 베로나를 떠나 네그라에 위치한 라 다마(La Dama)라는 와이너리로 향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이라 정갈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갈색 눈의 수줍은 미소를 지닌 와이너리 사장의 설명을 들으며 포도밭, 숙성고, 저장고 등을 둘러보고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는 시음장에서 와인을 한 모금 입 안에 담아 본다. 발폴리세라와 아마로네가 목젖을 타고 몸 속으로 흘러 들어 온다. 이탈리아의 태양과 바람이 몸 속에 은은히 퍼져 나간다. 그 오후 포도밭의 태양과 바람을 마음과 몸에 담고, 그 저녁 사랑이야기에 곁들어질 와인 몇 병을 두 손에 들고 버스에 올랐다. 볼로냐로 향하는 길, 우리는 이번 여행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와 얻어가고 싶은 것, 버리고 가고 싶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때 차창 밖의 구름은 ‘모든 것을 잊고 즐기라’고 말하는 듯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