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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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 역사 --- "역사의 현장, 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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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역사속 한 장면 - 일본군 위안부, 자발이냐 꾀임에 의한 동원이냐?
3-2.
3-3.
3-4. 만나러가야할 길 – 나를 붙잡아 끄는 역사 속 사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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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처녀 '옥실이'
일본 방직공장 일꾼으로 착출 되어
고향 땅을 떠나다
하루는 다들 일 나가고 할머니 혼자 집에 있는데 우리 집에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 이렇게 두 명이 찾아온 거야.
그때가 열일곱 살 되던 1942년 음력 5월쯤 됐을 걸 아마? 한 명은 말을 타고 또 한 명은 그냥 걸어 왔다는데, 할머니한테 나를 “일본에 있는 방직공장에 보내야한다”고 통고했다는 거야. “거기가서 3년만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네가 “며칠 뒤에 다시 올 테니까 옥실이를 어디 내보내지 말고 꼭 집에 붙어 있게 하라”하고 갔다고 하데. 많일에 “도망가고 없으면 우리 식구 모두를 총살시킬 줄 알라”면서 무섭게 협박까지 하고 갔대요.
그러니 어떻해? 할 수 없지. 내가 일 끝나고 집에 오니까 할머니가 나를 붙잡고 울면서 “순사가 다녀갔다”며 그 얘길 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절대 못 보낸다”고 종일울 우셨어요. 나도 이국 땅에 혼자 가는 게 무섭고 싫었지. 하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잖아? 내가 안 가면 우리 가족들을 다 죽인다는데.
그래서 내가 그랬지. “할머니, 할머니. 너무 걱정마. 설마 거기 가서 죽기야 하겠어? 내가 가서 3년 동안 열심히 일해가지고 돈 많이 벌어 올게” 나는 속으로는 무섭고 걱정도 됐지만 ‘열심히 일해서 우리 할머니 호강시켜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는 며칠 있으니 순사가 다시 찾아왔어요.
아침을 먹고 있을 때였지 아마? 이웃에 사는 내 나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도 같이 왔더라구. 그 애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 그애와 나, 우리 마을에서는 이렇게 둘이 가게 됐다고 했어요.
할머니도 우시고 아버지도 우시고 모두들 눈물바다였어요. 가야지 어떻해.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순사를 따라 집을 나섰지. 우리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우시면서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셨어요. 할머니한테 내가 “할머니 걱정마, 잘 갔다 올게, 돈 많이 벌어서 올게”하면서 겉으로는 담담한 척 위로를 했지.
하지만 속으론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한 번도 고향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거든. ‘아이구, 내가 거기 갔다가 다시 못 돌아오면 어쩌나’하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거예요. 순사를 따라 가다가 또 돌아보고 가다 또 돌아보고, 그렇게 해서 간 곳이 기차역이예요.
무슨 역인지는 몰라. 평양역인가?
거기서부터는 순사가 어떤 여자한테 우릴 맡기데요. 이 여자를 따라서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을 갔어요. 어스름녘에 배가 들어오는 항구에 도착하대. ‘일본 가려면 배를 타야 하니까 이제 배를 타려는구나’하고 생각했지. 거기가 어딘지 기억도 안 나. 항구에 여자애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다들 나같이 일본에 일하러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한 60명쯤 됐나? 같이 온 여자는 우리를 내려놓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그냥 그렇게 서 있는데, 한 30대쯤 돼 보이는 깡마른 여자 하나와 남자 몇 멸이 우리들한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배를 타라고 지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배에 올랐지. 그 사람네들이 우리들을 일본까지 데리고 가는 모양이었어요. 깡마른 여자는 위에는 하얀 것을 입고 아래에는 몸빼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남들도 그냥 보통 차림, 군대 복장은 아니야.
일본 방직공장에 간다더니
중국 남경에 내려놓다
배를 타고 나는 ‘이제 떠나는구나, 일본에 가는구나’ 싶었지. 그런데 그 배가 밤낮없이 며칠을 자꾸만 가는 거예요. 일본까지는 한 이틀이면 간다고 들었는데 어딜 그렇게 가나 싶어 겁이 났어요. 배에는 일반 사람들도 많이 타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이 배가 어디로 가는 거예요?”하니까 중국 상해를 돌아 남경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거야. 기가 닦 차는 거예요. 고향집 할머니 생가도 나고 그냥 무섭증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는 아무 생각도 없어요. 베멀미가 어떻게나 심한지 누워도 안 되고 앉아도 안 되고 세 끼를 주먹밥 하나씩 주는데 먹지도 못하고 계속 구역질만 하는 거예요.
며칠을 그러고 갔어요..
하루는 기진맥진해 있는데 배에서 내리라고 해요. 그대가 아침나절이었어요.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까 밤낮없이 와서 보름 만에 떨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거기가 남경이라나?
배에서 내리니까 군용 트력이 여러 대 와 있어. 그걸 타고 또 어디로 가는 거예요. 한 차에 스무 명 정도 탔나 몰라.
트럭을 타고 하루 종일 가서 해질 무렵 즈음 되니까 어디다 내려놓는 거예요. 나와 고향에서 함께 간 친구를 포함해서 모두 열 명 정도를 내려 놓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까 민가도 없는 산골짜기였어요. 거기에 도착해보니까 군인들이 판자로 가건물을 퉁탕퉁탕 짓고 있데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지. '공장을 지금 짓나 보다. 공장이 다 지어지면 여기서 일하나 보다'고.
첫 날 하룻밤은 천막 같은 것을 쳐놓고 거지처럼 대충 잠을 잤어요. 자는 둥 마는 둥 자는 거지 뭐.
다음날 되니까 집이 얼추 완성됐는데 일자로 길게 지어 놓은 집이에요. 대문도 없고 지붕도 제대로 없어. 시골 닭집같이 그렇게 지어 놓은 집이이야. 칸칸이 칸을 질러서 방이 한 10개가 있고, 제법 큰 방이 또 하나가 더 있어......
씻을 수 없는 치욕
'일본군 위안부'되다
"말도 마요, 나 거기서 생구녕을 뚫는다더니.....일본놈한테 생구녕을 뚫렸어. 아프다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어요."
매일같이 사병들이 오기 시작하는데....
하루에 한 열 명이 왔어요. 여자들은 밤조, 낮조 2교대로 나눠서 번갈아가며 군인을 받았어요. 밤이든 낮이든 군인 받는 날에는 꼼짝없이 그 짓을 해야 되는거야. 주말에는 더 많아서 15명 정도가 와.
나 거기서 고향의 우리 할머니한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그 짓을 당했어요.
해방되고 중국에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 돌아와서도 이북 고향 땅 못 가고 나 혼자 떠돌이 신세 되어 살았어요.
.......
@ 가족들을 향해 뒤돌아 보는 옥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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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실은 192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열 여섯 살 무렵, 조선 마을 곳곳에서 있었던
일본 방직 공장 착출을 통고 받고 배에 오르지만,
그녀가 끌려간 곳은 중국 남경의 일본군 위안소.
1942년부터 1945년 해방되는 해까지 3 여 년 간
그녀는 치욕스런 일본군 성노리개 역할을 해야 했다.
1991년 군위안부 첫 증언자, 고 김학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현재까지
일본은 조선인 여성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있다. 문서적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관련자료는 패전 당시 상당 부분 소실되었고
지금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자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 소녀들,
지금은 할머니가 되거나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간
그들의 증언이
바로 일제가 저지른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다.
위의 '역사 속 장면'은 일본 순사가 개입한,
속임수에 의한 강제로 동원의 실례이다.
**
나는 1990년 중반, 김옥실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의 한 많고 치욕적인 인생 한 자락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 그리고 명예 회복이다.
손녀 딸 뻘 되는 나에게
아프디 아팠던 과거의 상처를 처음으로 쏟아내었던 김옥실 할머니.
그녀는 우리 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그녀도 나도 아픈 역사의 반복을 바라지 않았기에
망각하고 싶은 과거 기억을 되살려내며
함께 치를 떨고 함께 눈물 흘리며
그 시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일제강점기,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격정적 삶의 이야기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이 시대를 사는 한 개인인 나 역시
우리들의 부모, 조부모의 삶과 역사에 관심 갖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삶이
바로 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서은경 쓰다 (2001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