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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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스승을 잃었습니다.
뒤늦게 전해진 소식을 듣고 달려간 세브란스에서 차마 볼 수 없는 스승의 얼굴을 뵙고 내려오는 순간, 우주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눈 앞의 현실은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저렇게 가시게 할 순 없어, 그럴 순 없어. 내 맘은 말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날, 한바탕의 눈물이 강도 9의 지진처럼 내 몸을 훑고 지나간 이후,며칠 동안 눈물은 다시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얼굴 한 번 보여주고, 딱 닷새 만에 스승은 영영 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피하고 싶었던 ㅅ소식을 듣는 순간, 세상은 정지되고, 더 이상 현실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장례식장으로 바로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웃고 있을 영정 사진의 스승을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릴 없이 집안 일을 찾아 하며 시간을 지연시켰습니다. 애들이 먹을 음식을 잔뜩 만들고 평소 잘 돌보지도 않는 화분에도 일일이 물을 주었습니다. 할 일이 더 없나 찾다가 더는 할 일이 없음을 알자 그제서야 집을 나섰습니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경계 속을 운전하며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을 향해 달렸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목의 신호등에 걸려 대기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또 한 번의 울음이 찾아왔습니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울음에 온전히 몸을 내어주었습니다. 그 이후 그런 울음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관 속에 든 스승의 얼굴을 직접 만질 때에도, 수의에 꽁꽁 싸여 싸늘한 시신이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뚜껑을 닫기 전 스승 수의 위에 향유를 뿌릴 때에도, 양재동 화장터에서 몇 줌의 뼈로 남은 그가 하얀 가루로 화할 때에도 그저 망연한 눈에 눈물이 천천히 흐를 뿐, 그런 짐승같은 울음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장례가 끝날 때까지 사흘 내내 거의 스승 곁을 지켰습니다. 사람들이 곡을 하고, 미사가 내내 진행되어도 나는 여전히 스승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한 번, 딱 한 번 더 더 큰 진동을 동반한 울음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5월 21일, 남미의 남쪽, 파타고니아의 심장 도시 칼라파테에서였습니다.
그날은 일행들과 오랫만에 주머니를 열고 질좋은 아르헨티나 쇠고기 파리야 parilla(숯불구이)를 먹으러 동네에서 가장 폼나는 레스토랑에 가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있을 때 커튼을 걷고 갑자기 내다보게 된 하늘, 막 시작된 일몰이 하도 아름다워 홀린 듯 집을 나섰습니다.
마을 끝에 자리한 숙소는 한 쪽이 평원을 향해 열려져 있어 한적하게 산책하기에 좋았습니다. 멀지않은 공터로 걸어나가 둥그렇게 만들어놓은 계단에 앉았습니다(사진 위)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끝도 없이 넓고 장대해서 어느 때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사실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구름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날 저녁 하늘 역시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빠르게 이동하는 검푸른 구름 사이로 붉은 노을이 점차 사위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어느 순간, 설명이 불가한 감정이 안에서 북받쳐 오르더니, 급기야 짐승같은 울음이 내 안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꺼억 꺼억~
그것은 단순히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알 수 없는 분노도 함께였습니다. 스승의 부재를 실감도 못하는데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 아직 내 삶을 열지도 못했는데 봄바람 타고 홀로 가버린 스승에 대한 배신감, 계실 때 유능한 스승을 제대로 활용 한 번 못해본 내 못난 열등감 혹은 자존심, 내 삶을 옥죄온,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의 굴레에 대한 토악질까지. 이역만리 변방에서 꼭지가 제대로 돌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의 울음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스승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쓰신 편지 한 통이 발단이었습니다. 그 편지는 곧 발간되는 <구본형의 편지>라는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의 대학 선배가 기획해서 월간중앙에 1년간 연재했던 스승의 편지들이 그 책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 편지를 스승은 내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스승은 '집중의 문제'를 가진 한 전형적인 인물로 저의 케이스를 사용하셨습니다.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약간의 과장을 얹었지만 스승이 편지를 보낸 대상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분명히 저였습니다. 그 편지는 정말로 저에게 주는 스승의 마지막 충고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책을 보시면 알것이기에 일일히 여기에 적진 않겠습니다. 다만 요지는 이렇습니다.
아이도 충고를 싫어하는데, 하물며 어른에게랴. 어른에게 충고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알지만, 오늘 네게 마지막으로 나, 어리석은 짓 한 번 하려고 펜을 들었다. 팔방미인 밥굶는다는 말이 널 보면 생각난다. 여러 재능으로 삶의 모든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하면 말릴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에만 집중해라, 너는 지금 성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돌아와라. 작가로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그것에 시간을 주거라. 10개의 얕은 아마추어의 기쁨보다 1개의 깊은 프로의 기쁨을 가져라. 그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니, 네가 그 맛을 꼭 보길 바란다.
유순하고 말이 별로 없는 스승으로서는 각오하고 쓴 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어언 3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 편지 이후에도 저는 스승의 문법대로라면 성공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스승의 충고를 새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다시 그 편지를 읽고, 통렬한 눈물을 멈추지 못하지만 내 안에는 뿌리깊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보건대, 앞으로 달라지리라는 자신이 없는 겁니다.
계실 때는 그저 그분께 들을 수 있는 하나의 충고였지만 이제는 더는 들을 수 없는 충고로 남아버렸습니다. 이렇게는 안된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실패가 두려워 결심하지 못하는 중증의 병에 걸린 자신을 봅니다. '매일 글을 쓰지만 책으로 사람들에게 도장을 찍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라'는 스승의 말씀이 시리도록 푸른 날을 세우고 오늘 다시 나를 찌르지만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더 큰 힘이 나를 짓누릅니다.
나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내게 정말로 소중한 건 미룬다는 사실입니다. 간절히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 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내 책을 내는 일입니다. 맘먹으면 대체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맘먹고도 이루지 못한 일이 내 인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내 책을 내는 일입니다. 소중한 걸 미루는 것의 결과는 번민으로 삶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진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말대로 아직, 제대로 간절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연구원이 된 이래, 특히 스승이 제일 먼저 책이 나올 거라고 믿어주신 순간부터 책은 내 어깨의 멍에가 되었고, 한 번도 간절한 소망 리스트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는 두려움과 각오가 같이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그 말은 각오도 남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스승의 말이 저를 사정없이 찌를수록 통쾌했습니다. 그런 가학이 나를 앞으로 가게 해줄 것이라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시간과 함께 또 다시 통증은 희석되고 남은 건 내 오랜 습관 뿐이었습니다. 통렬하다 믿었던 각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어제와 다르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꺼내든 편지에 또 다시 찔려 더할 수 없는 고통에 이렇게 울고 있지만 그 눈물이 각오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슬픈 내 현실입니다. 이 고질병, 제대로 한 번 넘어서고 말거야, 하는 각오 대신에 뿌리깊은 두려움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어주는 자신이 보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스승에게 진 큰 빚이 있습니다. 편지를 받을 당시 그와 공저로 책을 하나 쓰고 있었습니다. 5기들이 크로아티아 여행기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 진행되지 않았고 스승은 자신이 여행 중에 쓴 시 20편을 내게 건네주며 나와 여행기를 함께 내자 하셨습니다. 그 전에 프리북페어에서 첫 책이 되면 좋을 주제로 두 번의 다른 발표를 했었습니다. 그 책들에 앞서 우연하게도 존경하는 스승과 공저로 책을 내게 되어서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여행을 기획한 저에게 스승은 더 많은 지면을 양보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승과 함께 쓰긴 하지만 내 책을 쓴다는 기분으로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70-80% 완성된 그 책의 원고는 끝내 마무리 되지 못했고 바쁜 일상에 밀려 역사 저편으로 멀어졌습니다.
제 글과 함께 책이 되었어야 할 스승의 20편의 시가 아직도 제 손에 남아있습니다. 편지를 읽고 나서 스승의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고이 감추어두었던 그의 시를 펼쳐 읽었습니다. 그 시 속에서 스승은 내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아직 기다리고 있다!
눈물을 그치고 미루어왔던 것들을 해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 길만이 스승의 충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고 사부를 영영 잃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더불어 내 자신, 책이라는 미망을 한 번은 넘어서야 마음의 음지를 벗어나 양달로 진정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는 게 무섭습니다. 너무 소중한 것은 이룰 용기가 없다는 것, 그것이 내 역사가 반복적으로 내게 말해준 메시지입니다. 시작하고 다시 완성하지 못하면? 악몽처럼 찾아드는 이 생각 때문에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떨고 있습니다.
5억년 내 안에 아로새겨진 유전자의 강한 힘이 나를 옥죄지 못하도록, 알면서도 오래도록 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내 발을 묶지 못하도록, 내게 진정 소중한 것에 물을 주는 일, 그 일을 시작해야 할텐데, 내가 진정 할 수 있을까요? 책상에 올려둔 사진(9기오미경씨가 선물한 액자) 속의 사부는 아무 말없이 날 보고 웃고 계십니다.
쉬울 듯 가장 어려운 그 일이 눈물과 함께 다시 내게 숙제로 남겨졌습니다. 나는 과연 잘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오랫만에 컬럼에 글을 올려 봅니다. 올리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사부님 책 마무리 작업을 돕던 미옥씨가 보내준 편지를 읽다가 예의 그 눈물이 터져서 내 블로그에 푸념하듯 올린 글인데 오늘 아침 갑자기 연구원 이야기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마치지 못한 책을 마치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올라와서 용기는 없고, 여러분의 지지를 얻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올리고 보니 부끄러웠습니다.
내 의도가 너무 뻔해 얼른 글을 내렸습니다. 그 사이 두 명이 읽었더군요. 좌샘이 그 중 한 명입니다. 내게 문자를 보내 왜 글을 내렸냐고 질책을 하시더군요. 아예 연구원이야기가 아니라 칼럼에 올리라고 재촉을 하셨습니다. 그 마음 의지해 이곳에 조심스레 글을 올려봅니다.
챙피해서 다시 읽지는 못하겠지만 여러분이 댓글을 많이 달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숨기지 못하겠습니다.
천하의 로이스라는 말을 많이 듣던 제가 책 못내는 몇 년 사이 아주 주눅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양지로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사부가 속상해하던 이것저것 찝쩍대고 결과는 못내는 쭉정이 팔방미인 로이스가 아니라, 사부가 바라는대로 프로로 사는 것의 기쁨을 맛보는 괜찮은 작가 로이스가 되도록 응원해주시지 않을래요.^^**
정말 자신의 책을 내기 전의 즐거운 워밍업으로 몽골 여행기가 9기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재용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9기들의 면면을 듣고 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루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90% 이상의 사람들의 문제라는 보고도 있더군요.
제 이야기가 거울이 되서 후배들은 책이라는 미망의 늪에 너무 오래 잡혀 있지 않고
쑥쑥 자기 책을 내고 자기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네요. 물론 서로 손잡고 함께요!
사부님과 딱 10분만 얘기 나눠보고 싶다는 소망, 이미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요.
선배들 속에 살고 계시는 사부님과, 이미 글로 자신을 다 풀어놓으신 사부님을 지금도 만나고 있을테니까요.
저는 이상하게도 사부님 돌아가시고 더 사부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참 괜찮은 휴먼비잉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더 깨닫고 있습니다.
현역을 마처봐야 안다.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선배님들이 늘 하던 이야기 였습니다.
질투가 날 만큼 스승은 현역을 챙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보지 않고 현역을 사랑한다.
이런 말로 질투의 말을 대신하는 것을 들으며 공부했습니다.
스승을 모시고 스승과 함께 수료여행을 가지 못한 현역이었습니다.
현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은 저희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슬픈 것은 당연합니다.
거리두기의 시간이 없었던 저는 사랑을 발효시킬 시간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칠 사랑인지 경험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한해 두해 사랑을 키워갈 시간이 있었던 사람에게 상실의 아픔이 더 크겠지요.
시간만큼 많은 추억과 시간만큼 커져버린 사랑을 감당해야하는 것도 남겨진 사람의 몫이지요.
스승은 안아주실겁니다.
가만히 등을 두드려 주시겠지요.
울만큼 실컷 울라고 기다려 주실겝니다.
스스로 일어설 에너지도 불어넣어 주실겝니다.
누구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분과의 추억을 본인이 원하는 형태로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힘도 주실겁니다.
응원합니다.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전 통화를 하면서 여행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것을 기억합니다. 책과 여행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에 에너지가 생기고 눈빛은 강렬해짐을 느꼈지요. 언젠가 사부님에 대한 그리움이 이런 글이 되어 흘러나올 것이라는 저의 예감이 적중했군요. 누님께서 쓰셨던 인터뷰 칼럼이며, 여행 이야기들을 다시한번 글로 보고 싶습니다. 책을 내는 것이 최종 종착지가 아닌, 또 다른 시작임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시작을 누가 먼저 하느냐 늦게 하느냐죠. 누님께서 받으신 20편의 시.. 정말 부럽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부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던 로이스 누님. 한때 저에게도 로이스 누님은 질투의 대상이였음을 수줍게 고백합니다. 늘, 현역과 함께 하셨던 스승님이셨기에 어느샌가 그 질투가 너그러움으로 바뀌길 바랬지만, 아직도 누님께서 받은 사랑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이번 몽골여행을 통해 아시겠지만, 누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받으신 로이스 누님! 자- 이제 함께 가요---!
아마 이런 글을 용기내서 올리는데는 재엽과의 긴 통화가 한 몫을 했을 거야. 언제나 에너지를 팍팍 실어주는 그대. 나를 질투했다고? 아마도 다른 누군가는그대를 질투했을 걸. 컬러풀한 재능 하면 재엽일 뺄 수 없지.솔직히 우리 연구원에 재능없는 사람이 어디있나. 그래도 사부님은 늘 오래 갈 사람, 어제와 오늘이 변함이 없는 사람, 날마다 꾸준히 하면서 '날마다의 힘'을 보여주는 사람을 찾으셨지. 나에 대해서도 긴 미스토리 읽고 오해를 하셨기에 연구원으로 뽑으셨을 거야. 그런 실수를 통해 사람 보는 눈을 더 기르시고 갈수록 더 나은 후배들을 뽑으셨겠지.^^** 암튼 고마워. 나도 날마다 글을 쓰고 싶어. 글을 쓸 때 내가 나라는 걸 더 느끼지. 내 삶이 비교적 좀 복잡하고 일이 많은 건 사실이고 내가 만들어내는 핑계는 근거가 없진 않지. 그러나 핑계는 결국 핑계일 뿐, 나도 심기일전할 길을 다시 만들어볼게.
함께 가자. 이곳에서의 성장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함께 갈 때 의미가 있을거야. 개성 강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닿아서 공헌하는 인간들로 바뀔지, 사부님은 늘 그게 관심거리였지. 우리가 함께 잘 해나가면 그게 사부님 실험을 완성해드리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해.
지웠던 글 다시 올리길 잘하셨네요.
의도가 뻔하면 어떤가요.
아플 때 "아야"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함께 모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연히 저도 그 편지를 읽었어요. 그리고 누나의 이 글을 보게 되었구요.
어쩔 수 없이 그 맘때의 일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여행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전 그 여행 자체로 너무나 좋았습니다.
하지만 누나 입장은 다르시겠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 한테도 몇번 빚을 졌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그만큼 부담을 많이 가지고 계셨다는 의미겠구요.
이 글을 쓰실 때의 애틋함으로
얼마간 여유를 갖고 한걸음씩 가신다면
원하시는 결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응원해 봅니다.
재동이 고마워. 아플 때 아야하는 게 아직은 챙피한 걸 보니, 내가 먼저 더 열고 가슴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겠어.
그래, 여행기가 나오지 않았어도, 우리는 언제나 여행 그 자체로 행복하고 좋았지. 그러나 빚진 마음은 그냥 가져갈래.
마음으로 대상에게 다가가 언제나 좋은 사진을 찍는 재동이의 재능을 내 책에 한 번은 녹여야 하는데, 그럴 기회를 주지 못했잖아.
사진 잘 모아놔. 그동안 사부님과 함께 했던 7번의 여행을 회고하며 <변경연의 여행>이라는 책을 낼 수도 있으니까.
진정한 여행이 무엇인지 쓰는 이나 읽는 이가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말이야.
우리들 대부분은 항상 후회를 하며 살아갑니다. " 아! 그때가 소중한 시기였는데, 아! 그(그녀)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라고 아쉬워하지만 그 '보물'은 이제 내곁에 없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더군요.
한숙 선배, 이렇듯 풍부한 감성을 갖고 있고 그것을 토해내는 글 또한 섬세하며 진지함이 묻어나오는데 왜 그동안 침묵했는지요? 그렇다고 선배, 만사 제쳐놓고 뛰어들라고 예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선배의 삶, 인생이 있으니까요. 달리기를 하면서 느낀 것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면 걷게 되는데 이때 몇분안에 다시 '발동'을 걸지 않으면 의욕을 상실해 끝내 경기를 포기하게 되죠. 그런데 반사적으로 두발을 교차하며 아주 느린 속도로라도 뛰면 어느새 종착지점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발을 빼지 않고 담고 있다보면 어느날 비상할 수 있는 날이 올거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세일즈를 하며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던 사람이 이제는 고요히 달리기를 하면서 산책을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삶을 하나 하나 되짚어가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대 손 안에 세상이 담기고, 그 인생은 시간 따라 점점 더 맛나게 익어가겠지요.
선배님 나는 이게 참 좋아요,를 여러번 되뇌이며 인생의 힘든 고비를 멋지게 승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럿 들려주었지요.
그게 자기의 삶이기를 염원하는 마음, 그 안에 가득했지요. 그러나 후배, 그대는 이미 그런 삶 속에 있더이다.
멈추지만 않고 있으면 어느날 종착지에 닿게될 것이니 지치고 힘들 때에도 완전히 주저앉지 않을 것,
아주 느린 속도로라도 두발을 교차하며 뛸 것! 달리기를 통한 멋진 인생 비유입니다.
언제 한 번 같이 달려요. 달리기를 통해 얻은 인생 교훈, 좀 더 듣고 싶네요.
연구원시절 당차고 거침없던 웨버 모습에 익숙한 내게, 지금의 한숙씨 모습은 낯서네요
책쓰기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리 고민하고 망설이는지...
써야겠다면 그냥 쓰면 되고, 다른 일로 바빠 못썼으면 앞으로 쓰면 되는거죠
그것때문에 주눅들 일도, 두려워 할 일도 아니고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할 일도 아닌데....
한숙씨 고민은 잘해야겠다는, 잘하고야 말거라는 집착에서 나온거 같네요.
그런 집착이 한숙씨\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 앞으로도 책쓰기는 어려울 거에요
평생 책 한권 쓰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으니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죠.
하지만 책쓰기가 진정한 소망이라면, 이제 잘써야 겠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보세요.
그냥 조금씩 꾸준히 써봐요. 사부님이 아까워 하셨던 만큼
한숙씨는 좋은 책을 엮을 수 있는 자질과 역량을 갖추고 있으니...
바쁜 일상을 조금 정리하고 생활 우선 순위의 둘째를 글쓰기에 두고(첫째는 물론 호구 해결^^)
매일, 매주 나만의 장소에서 일정 분량을 써나가다 보면 한숙씨가 바라는 결과를 얻게 될겁니다.
너무 잘 쓰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이전에 썼던 대로, 지금 쓰는 대로 한숙씨의 갖고있는 바를 토해내면 되요
그것 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꽤 괜찮은 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 출신이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는지를 묻는....
조금은 안타까운(?) 상황에 이런 댓글을 달면서,
이게 한숙씨에게 하는 얘긴지 내 자신에게 하는 얘긴지 나도 헷갈리네요...ㅠㅠ
여하튼 부지깽이 역할이 필요하다면 좌샘처럼 나도 도울께요....^^
시실리에서 나눴던 많은 이야기들을 지난 시실리 여행기에 넣지 못했는데 써니 누님이 여행기를 보시고 글로 남기지 않은 많은 것들을 더 적어보라 하셨었습니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좀 느낌은 왔지만 사실 잘 알지는 못하고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전 연구원도 못해봤고 9기 연구원 지원해보고자 했는데 마침 사부님과 같은 수술로 그 마저도 못해버려 뭐라 토로할 아쉬움도 없네요.
예비 모임, 인천 공항, 비행기, 이스탄불, 로마, 나폴리, 팔래르모, 체팔루, 타오르미나, 낙소스, 에트나, 시라쿠사, 피아차 아르메리나, 빌라 로마나, 아그리젠토, 터키의 계단, 돈나푸가타, 팔래르모, 지중해의 밤, 나폴리, 로마 긴 여정을 통해 나누었던 많은 교감들 이야기들 장면 장면에 비춰진 나의 삶의 흔적들과 모습들 그리고 들켜버린 나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무엇보다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여행 내내 낯설지 않게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책 내시는 일은 아직 인연이 아니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생 돌고 돌아 더 많은 것을 눈에 넣은 뒤에야 진정 할 이야기를 풀어놓으 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몽골에서 누님 얘기 더 많이 듣고 싶네요.
아, 진정한 독종 희동이. 놀기도 잘 놀고, 절제도 잘하고...
희동이 댓글 때문에 시칠리아 여행의 추억들이 시간차로 빠르게 지나가는구나.
나는 돈나푸가타 와이너리에서 기사가 차 빼는 동안 포도밭에서 사부님과 와인병 풀고 올려다본 별총총 하늘과
타오르미나의 밤 수영,터키 계단 바닷가의 파도타기, 마지막날 갑판에서 밤을 꼬박 새던 때의 기억이 가장 아련하다.
사부님과 같은 수술 받았다는 이야기 들었다.
네 안에 한 점 먼지 만큼이라도 스트레스라는 녀석이 남아있다면
몽골에서 다 털어버리고 건강해져서 돌아오길 바란다.
이번에도 많이 떠들고 마시게 될 거다.
그 어느 때보다 노래와 웃음이 많은 여행이 될 거다.
함께 갈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네 말대로 내 책은 때가 되면 나올 거다, 믿고
마음 편히 먹으려 한다.
대신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일상을 다시 회복해볼게.
고마워.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35도가 넘는 자동차 안에 에어컨도 없이 언니와 나란히 앉아 있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연구원 칼럼에서 뜨겁게 달궈진 언니의 글을 읽기 전이었고, 주제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지요.
어떤 글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아요. 아마도 뚱뚱한 여행 가이드에 대해서 썼던 글이었던거 같아요.
그 글을 읽은 후로 나는 언니는 작가가 되겠구나! 나라는 막연한 확신과 기대를 갖고 있었지요.
그리고 4-5년이 지났지만 언니는 책을 쓰지 못하고 있다며 자책과 무거운 책임감 속에 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여전히 언니가 글 쓰는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포기할 수가 없네요...
우리, 길게 이야기 하면서 내 생각과 언니의 두려움 사이의 간격을 좁혀 나가 보아요. ^^
힘이 된다면 같이 뛸께요.
크로아티아, 내가 언니와 같이 여행 했다면 같이 쓰자고 손 잡고 싶은 책이네요...
잘 만들어 주세요. 천하의 로이스! ^^
아이디를 단경(旦京)으로 바꿨어요.
'서울의 아침'을 뜻하는 저의 호예요.
초아 선생님이 2009년에 지어주셨는데, 필명으로 하려고 아껴두었던 거예요.
이제 이 이름으로 새로 시작해보려고요 .
고마워요 미영씨. 뒤에 댓글이 하나 더 달린 걸 이제야 확인했어요.
뎀벼봐, 그대의 아이디가 무엇에든 자신있게 도전장을 내밀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지네요. .
미영씨를 보면 책을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한 권 써내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다는 거,
그 과정을 견뎌내는 내공이야말로 그 사람을 말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3권의 책을 냈으니, 미영씨는 얼마나 더 깊어지고 넓어졌을까.
그 점에서 나보다 어린 사람이지만 늘 고개를 숙이게 된답니다.
언니는 작가가 되겠구나, 그런 느낌을 가졌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우습게도 나는 내가 작가다, 라는 정체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책쓰는 것이 의무가 되면서 글쓰는 즐거움을 어느새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아요.
글이 좋아서 그냥 썼고, 쓰다보니 글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이전의 순수함이 그립네요.
글쓸 장을 마련해주면서까지 함께 성장하려고 애쓰는 그대의 예쁜 마음씨,너무 고마워요.
정말이지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