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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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에서 프로젝트가 끝나면 반드시 하는 활동이 하나 있다. 이름부터
애매모호한 ‘포스트 모덤’. 첨에 들었을 땐 이 빠리지엥한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었다. 포스트 모덤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공유하는 활동이다. 말이 공유이지 팀원 각자가 자신이 했던 실수담이나, 아쉬웠던 점, 아이디어등을 기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록이다. 팀원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기록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사실 포스트 모덤 활동에 대해 팀원들 대부분이 불만이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쉬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인데 막판의 문서 작업은 여러모로 기운이 빠진다. 하지만 일정상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문서작업까지 병행하기는 빠듯하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이 시점에서 문서를
몰아서 작성하는 이유도 알고있다. 다들 입이 한가득 나왔지만 군말 없이 지시에 따른다. 포스트 모덤이 중요한 활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포스트 모덤이 중요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나를 괴롭혔던
문제들은 반드시 다음 프로젝트에서 반복된다. 경험상, 그리고
정황상 10% 가까이는 발생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몇일간
날을 새가며 해결했던 문제들이 다음 프로젝트에서 다시 발견되었을 때, 그때는 포스트 모덤 문서를 찾아보면
된다. 적어도 포스트 모덤 문서에 있을 것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두번째로는 아이디어를 확장시켜 준다. 다른 모듈 담당자의 고충사항을 보고 있으면 사고의
확장이 일어난다. 그들의 아이디어들을 보다보면 내가 담당하는 분야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까지 얻을 수 있다. 통찰이 깊어지는 것이다.
회사 업무와 별개로 개인적으로도 기록을 많이 하는 편이다. 회사에서는
업무일지를 작성하고 집에서는 일기를 쓴다. 회사에서의 업무일지는 단순하다. 양식도 없다. 그냥 오늘 해야 할일을 적고, 진행사항을 체크한다. 회사에서 느꼈던 일, 배웠던 지식도 같이 적는다. 업무일지는 그 자체가 훌륭한 보고서이자
나만의 비서이자 스트레스 배출구이다. 업무일지를 따라가면 그동안 내가 어떻게 일해오고 변해왔는지 파악이
가능하다. 일기는… 계획만 하고 쓰지 않는다. 뭔가 근사한 느낌이 드는 날이면 일기장을 펴보곤 하지만 잘 써지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만 늘어간다.
이처럼 개인이나 기업도 기록을 하면서 산다. 사람이 살아봐야 팔십이요, 기업이 오래가봤자 백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왜 기록을 하는 것일까? 피곤하고 가끔은 귀찮은 기록작업. 죽으면 다 없이질 몸이요, 파산하면 다 사라질텐데 왜 이토록 기록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건 기록하여야지만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기록하여야지 보관이 되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읽혀지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역사가 가치를 얻는 것은 그것이 기록되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록되지 않는 것들은 증명할 수 없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주관적인 것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역사왜곡처럼 정확히 기록되지 않는 것들은 항상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또한 기록하여야 잊혀지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남들에게서 잊혀졌을때’ 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 되었든 기록한다면 나라는 사람을 증명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일연이나 사마천의 사기 같은 역사가들은 몇쳔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서 잊혀지지 않는다. 인터넷만 쳐보만 그들의 사진과 그들의 이야기가 한가득 나온다. 그들은
위대한 기록물을 남겼다. 그들은 기록했고, 누구보다 잘 기록했다. 그들의 기록물은 훌륭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고 선조들의 문화와 시대상을 파악하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기록을 한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감정을 나누기 위해. 기록하자. 글을 쓰고, 책을 쓰자. 그리고
반드시 기억하자.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