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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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7] 내 안의 여자, 신마담
『또한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p27
그런 그녀가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남자다. 거울을 봐도, 목욕탕에 가도, 화장실을 갈 때도 둘로 나누어진 출입구에서 주저할 것 없이 나의 선택은 남자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선택은 늘 둘 중에 하나니까. 망설이면 의심받는다. 구실을 못하는 놈이거나, 변태성욕자로 몰릴 수도 있다.
체육시간이면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축구에 열광하지 못하고, 나무 그늘을 찾는 나는 나약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나는 그게 좋은 걸 어떡하냐고 달래도 봤지만, 그 열등의식은 뿌리가 깊어 뽑아내기 쉽지 않았다. 국어시간, 미술시간, 간간이 음악시간이면 짧은 쾌감들이 일었다. 시에 울렁거리고, 그림 속에 몰입하고, 음악을 들으면 눈이 감겨지는 그 시간들. 그렇지만 나는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와 함께 눈을 떠야 했고, 다음 시간 과목을 준비해야 했으며, 화장실에도 다녀와야 했다. 재미없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이 붙여주지 않으니 들어야 했다. 그래야 놀아 줄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시간이 나면 그들을 찾거나 어울리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책도 보고, 멍하니 하늘도 쳐다보고, 가끔씩 그림도 그리면서 주말을 보냈다. 그런 시간들이 좋았으니까. 그렇지만 너무 지루한 고독은 싫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군대에서는 더 심했다. 용감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소리도 크게 질러야 했다. 총을 들고, 각진 걸음을 걷고, 가슴을 내밀고, 당당한 하루 일을 시작하고, 하루 일을 마무리 한다. 현역을 다녀오는 것이 자랑이고, 방위를 받은 것은 내세울 일이 못되었다. 남자는 무거운 것을 들수록 자랑거리였고, 상 받고 칭찬들을 일이었다.
‘쎄야 하고’, ‘강해야 하고’, ‘과묵할 줄 알고’, ‘울면 안 되고’, ‘약점 보이면, 잡아 먹힌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것이 세상이다. 대체로 많이 죽인 사람일수록 영웅이다.
‘후렸다’, ‘죽였다’, ‘따 먹었다’, ‘그렇게 하니까 좋아 하드라. 까박 죽드라. 뻑 가드라’ 사랑마저도 그들에게는 이겨야 할 전쟁이었고, 죽여야 할 적이었다.
‘딸 같은 아들’, ‘아들 같은 딸’
“도대체 누굴 닮았냐”며 족보를 뒤적거리는 어머니는 ‘냅두라’는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나보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그 놈의 가계도를 마저 그린다. 그래야 근성이 풀리나 보다. 사실 나도 걱정이다. 그런 전쟁 같은 세상에 딸 내보내고, 아들 군대 보내는 것이. 내 딸이 어느 잡놈에게 뻑 갈까. 따 먹힐까. 걱정이다. 내 아들이 어느 집 딸을 후릴까. 까박 죽일까봐. 그게 걱정이다.
어머니도 모르는 비밀, 내 안의 여자, 신마담. 그녀를 닮은 탓이지, 누굴 탓하겠는가. 어머니 굳이 멀리까지 족보 뒤질 일 없어요. 그 속으로 낳아놓고, 아직도 모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