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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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7 - 비로소 ‘마음의 경영’이 시작될 수 있으려면 - 20100628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카를 융 자서전 P. 193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카를 융 자서전 P. 250
우리는 마음의 변화에 대해 그다지 인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떠오르는 대로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한다. 하루에도 수만번씩 변화해 가는 이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인지하고 살고 있는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적이 있는가?
모든 것의 원인이 마음에 있다고 수많은 철학과 종교가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마음을 관리할 줄도 경영할 줄도 모른다. 마음의 경영은 가능한 일인가?
‘로봇의 마음을 만든다’고 말하는 나는, 정작 내 마음에는 무관심 했었다. 내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변화로 야기되는 감정의 변화는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기압이 변할 때 바람이 일듯, 마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정서가 발생한다. 당연하겠지만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면 혼란이 발생한다. 원인은 모르지만 뭔가가 분명 잘못되어 가고 있는 인식은 하게 된다. 그러나 원인을 모르므로 불안하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위협은 훨씬 막강하다.
인공 마음을 만든다면서 정작 내 마음에는 관심 없던, 의식 없는 지식인으로 살아오던 나는 늘 그랬었다.
마음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기 시작할 때 그에 해당되는 감정이 동반 표출된다. 상황이 부정적일 때는 흔히 슬픔이나 우울과 같은 부정적 정서가 나타나고 긍정적일 때는 기쁨이나 희열과 같은 긍정적인 정서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정서라는 것은 근원이 무척 다양하다. 인간이 동물이라는 진화론에서 유래된 어떤 정서는 생존과 생식을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들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에 한계가 있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정서로 기쁨과 슬픔이 있다. 때로는 자신의 영역을 탐색해 나가거나 침입을 받을 때 생겨나는 기대와 놀람과 같은 정서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사회에서의 위계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 이 경우는 자신이 지배계층일 때 피지배계층을 지배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분노를 보여주고, 반대로 자신의 지위가 낮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포라는 정서가 표출되어 도주등을 행하게 된다. 혹은 ‘내가 누군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수용과 혐오의 정서도 있다. 이런 정서들은 모두 인간이 동물이라는 점과 그래서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거기서 유래된 정서이다. 플라칙(R. Plutchik)과 같은 정서학자는 진화의 역사를 지탱하기 위해 야기되는 기본 정서로 8종의 정서를 주장한다. 그 8종의 기본 정서들이 결합되어 2차정서나 3차정서가 만들어지고, 이것들이 서로 결합되어 많은 수의 정서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 결과 인간이 경험하고 호소하는 정서로, 361가지 종류의 정서가 있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그런데 어떤 정서는 인간이 가진 사고와 판단에 근거해서 인지적으로 평가되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정서란 생존과 생식을 위한 호르몬의 변화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사건에 맞닥뜨려지거나, 어떤 행위자의 특정 행위를 외부에서 관찰할 때 마음내부에서 어떤 정서가 발화된다. 때로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기만 해도 산출되는 정서도 있다. 이런 정서의 경우는 인지적 정서라 부른다. 즉 인간의 마음 내부에 존재하는 ‘정서평가 메커니즘’에 의해 정서가 계산되어 나오는 것이다. 오토니(A. Ortony)와 같은 정서학자는 이런 인지정서로 22종류(축하, 분개, 동정, 희망, 염려, 만족, 안도감, 공포, 실망, 슬픔, 자부심, 수치심, 찬양, 책망, 사랑, 미움, 희열, 감사 후회, 분노, 기쁨, 고소해함)의 정서를 분류하였다. 그런데 인지정서의 경우는 인간이 가진 인격이나 성격이라는 것이 하나의 필터로 작용한다. 즉 반사회성향이 강한 사람이 잘 보여주는 정서와 신뢰성이 강한 사람이 잘 보여 주는 정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성격별로 나타나지 않는 정서도 있고, 심각하게는 어떤 정서로의 통로가 막혀있어서 아예 드러나지 않는 정서도 있다. 예를 들어 심하게 우울한 성격의 사람은 슬픔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기쁨을 야기할 사건을 만나도 기쁨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이 100% 전부 우울하지는 않다. 우울증 외에 조증이라든가, 경계성이라든가, 사회성, 우유부단성 등등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어떤 인간의 복합적인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격의 특성(trait)에도 수십 종이 있다. 게다가 인간은 한 개의 성격으로 인생을 끌고 가지도 않는다. 일생 살면서 성격이 변화해 나갈 수 있다. 만약 10개의 성격특질을 가지고 행동하고 반응하고 정서를 나타내는 어떤 사람이 어떤 때는 10개의 특성 중 한 두개의 특성이 강하게 활동하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그 특성이 온데 간데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 변화에 따라 우울했다가, 진취적이 되었다가, 한없이 자신감이 생겼다가, 어느 날 자신이 너무 초라하여 목을 매달기도 한다. 이런 일이 마음내부에서 일어나고 그 결과로 정서가 표출된다.
그런데 이런 정서와 성격특성의 관계에 대해 나는 나 자신을 실험하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었다. 이론은 이론이고 나는 나였다. 그들의 심리학은 로봇에게 마음을 줄 때 알고리즘으로 만드는 것이지 내 마음을 분석할 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융의 자서전에서 그가 얼마나 깊은 정신적인 고뇌를 했는지를 보았다. 그는 자신과 주변 인물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했다. 어머니의 부재로 하녀에 관심을 가진 어린시절의 회상을 통해 자신 속의 아니마를 찾아내고 있었다. 늘 헤게모니 싸움을 하는 자신 속의 2개의 인격의 대립을 관찰하고 있었고, 어머니에게서 까지 2개의 인격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고 있었다. 또한 평소에 따뜻하던 어머니가 밤이 되면 으스스하고 위엄이 있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그는 어머니 속의 아니무스를 보았다.
그는 자신과 주변모두를 사고실험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것을 통해 자신이 주관자가 되어갔고, 그의 이론 역시 정립해 나간듯했다. 그로서는 그 사고실험이 상당히 짜릿한 과정이었을 것 같다. 융은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외적 사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건은 4살 이전에 일어난 일 까지도 80살이 넘어서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융은 자신의 일생을 통째로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10대 어느날 진짜 신을 체험하고는, 목사였던 부친의 영성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난다. 목사 아들로서 할 수 있을 법한 반항으로서의 탈선이 아니라, 신을 진짜 알기 위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교회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곳에는 하느님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융과 신은 일대일의 관계로 존재하게 되었고, 융은 인간뿐 아니라 자연에서도 신의 흔적을 보았고 기독교외에서의 구원에도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자기부정과 관찰, 사고실험 이것들을 융은 평생 지속해 갔다. 그리고 자신이 주관자가 된다.
전면 부정! 그렇다 우리는 어느 순간, 살아오던 규범을 전면 부인할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이 습관대로 결론을 내리던 것을 오늘도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의 기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먼저 판단해보아야 할 것이다.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페르소나, 집단 무의식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무의식에 대해서 다 체크하지는 않더라도, 프로이트의 이드(id)나 에고(ego), 초자아(superego) 등에 까지 확대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감정의 기원 정도는 체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음의 변화에서 감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서가 마음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최초 단서이기 때문이다. 정서의 발생 원인을 알고, 정서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마음의 경영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경영의 출발은 정서의 인지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정서의 유래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 인지를 알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10대의 어느날 자신이 느꼈던 슬픔이 영어 시험점수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날 아침에 엄마가 해준 계란찜이 너무 짜서 그랬다는 것을 20년 지난 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계란찜이 짜게 될 때 하루 종일 우울하게 되는 현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의 기저에는 엄마가 자신에게 무관심했었다는 원인이 버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지 모른다.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이라고 많은 선각자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경영을 주도적으로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마음 경영을 위해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가? 자신의 정서인지로 부터 출발해보자. 우리가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그 유래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비로소 ‘마음의 경영’이 시작될 것이고 우리가 마음의 주체가 될 것이며, 비로소 감정은 인생의 폭군이 아닌 우리의 든든한 지원자로 변하여 있을 것이다.

정서학자'라는 직업군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전문가도 있습니까? 22개의 정서를 나눈것은, 색상으로 치자면 빨주노초파남보'정도가 아닐까요? 빨강과 주황색 사이에는 무한한 색이 있듯이, 각각의 정서 사이에는 역시 무수한 감정이 미묘하게 존재할 것 같습니다.
'어떤 정서로의 통로가 막혀있다'는 이야기에서 조금 생각을 해봅니다. 정서가 막혀있다면, 예를 들어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병일 것입니다. 혹은 살인을 하고도 태연하게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길태 같은 사람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어서 사형이 선고가 되었습니다. 어떤 트라우마에 의해서, 무감각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치유하면 통로가 뚫릴까요? 어린 시절의 미세한 감정과 사건들을 떠올리고, 나를 이해하면 보다 건강한 인격이 될까요? 저는 의문입니다.
막힌 정서, 원활한 정서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강점과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주 '강점 혁명'을 읽는데, 책에서는 '뇌의 연결'의 정도에 따라서 강점과 약점으로 나누더군요. 약점을 훈련으로 강점으로 바꿀 수는 없지요. 마찬가지로, 막힌 정서가 원활한 정서로 바뀌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 경영은, 강점을 발휘하고, 약점을 관리하듯이, 자신의 감정의 시스템? 혹은 매트릭스? 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마음경영의 시작은 - 나를 아는 것.내 감정의 작동원리를 아는 것. 그것이 정서인지.

본능에서 생긴 욕구가 좌절될때 욕구불만이 올라오고 이때부터 자아가 작동 하기 시작,
자아는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방법들을 찾아가며 행동계획을 세울것이고
때로는 현실을 음미하며 자신이 세운 대안을 수정하고, 대로는 공상이나 백일몽을 통해 자아는 휴식하고........
사고나 추리, 인식기관은 계속 돌아가고................
그거 말고 또 얼매나 많을까?
또 각기관이 작동할때 억압이나 전이같은 심리학적 기제들이 영향을 줄것이고
정서는 곳곳에서 모습을 달리할테지
이것을 만들려면 내마음부터 알아가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