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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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 마더 테레사 -
'옆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사랑 못하는데 누굴 사랑해?' 이건 내 연애사의 화두가 되는 질문이다. 내 아내는 아직도 연애시절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말한다. 가끔 그때 생각이 떠오르면 그 분노를 표출한다. 난 꼼짝 못한다.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깨갱이다. 연애시절 난 가난했다. 군대 가기 전 잠깐 과외 아르바이트로 해서 번 돈 월20만원도 자취방 월세로 나가고 밥 사먹고 술 좀 먹으면 땡이었다. 그렇다고 돈을 더 벌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립대라 등록금이 그리 비싸지도 않았고, 장학금도 많이 줬기에 요즘 대학생들처럼 대출 받을 고민도 안 해봤다.
한번은 무슨 날이었는지 동네 경양식집에 갔다. 그녀가 8천원짜리 함박스테이크를 시키는 것이었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듯하며 먹고 나왔지만 '안빈낙도'를 꿈꿨던 난 속으로 그런 '사치!'에 화가 났다. 결국 그날 저녁엔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처음 그녀의 집에 갈 때는 당당하게 검은 비닐봉지에 귤 몇 천원어치를 사가지고 갔다. 화이트데이 때는 선물을 준 기억도 별로 없지만 학교 실험실에서 쓰는 유리병에다 싸구려 알사탕을 넣어서 이쁘게(?) 포장을 해서 선물한 기억이 있다. 물론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페레레로쉐'라는 이탈리아 초컬릿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난 짠돌이에 쪼잖하며 찌질한 남자였다.
그런데 각 사람에게는 서로 다른 '사랑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게리 체프먼이라는 미국사람의 <다섯가지 사랑의 언어>란 책에서는 '1.인정하는 말, 2. 함께하는 시간, 3. 선물, 4. 봉사, 5. 육체적인 접촉'으로 사랑의 언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검사결과 난 '인정하는 말'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그녀는 '선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사람마다 다를테니 서로가 중요시 하는 '사랑의 언어'를 꼭 한번 생각해 보시라.
돌이켜 보면 난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그녀에 선물하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과 인정하는 말로 어떻게 대체하려 했지 '선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선물'에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9년이라는 연애기간 동안 남들은 100일, 200일을 챙길 때 우린 1000일, 2000일, 결국 3000일을 축하했다. 그때마다 난 프로포즈를 했는데 그때의 퍼포먼스도 우리 연애 역사에 대단한 조크로 남아있다. 1000일은 기억도 잘 안나고, 2000일은 경희대 앞 레스토랑에서 케익과 코스요리를 먹었다. 선물은 없었다. 저녁엔 난 학교에 일이 있어 다시 들어갔다. 3000일때는 남산에 갔는데 자리에 앉아서 360도 서울의 전망을 볼 수 있다는 그 곳, 남산타워의 회전하는 레스토랑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올라갔다가 레스토랑 앞에서 메뉴판(가격표)를 보고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내려가 남산 계단에 앉아서 준비한 케익과 작은(!) 반지를 선물로 주었다. 물론 정성스럽게 쓴 편지도 준비했었다. 하지만 그 레스토랑에 가지 않은 것은 나의 실수였다. 거기서 식사했다고 내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내 사고방식이 그런 곳에 큰 돈을 쓰는 것을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돈이면 다른 더 가치 있는 것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이 날도 아내에겐 한으로 남아있다.
그녀를 서운하게 한 것은 물질적인 것 외에도 정신적 이유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교과서를 벗어나 자유로운 책읽기에 빠져들었고, 고등학교까지는 접해보지 못했던 막심 고리끼의 소설이나 마르크스의 계급적 관점을 보여주는 책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라는 새로운 기독교 사상을 만났다. 그러한 책들을 읽다보니 기독교인이었던 난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라는 슬로건에 마음을 뺐기게 되었다. 또 저 하늘의 천국이라는 허상을 씻고 사회구원과 사회변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아리와 공부방 자원교사 활동에 대부분의 에너지와 시간을 썼다. 그러다보니 데이트는 집에 돌아갈 때 잠깐 얼굴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잠깐의 휴식 같은 연애가 난 위안이 되고 힘의 원천이었는데, 지금의 아내에겐 서운함의 시간이었나 보다. 난 괜히 바빴다. 돈은 안될지언정 가치로운 일을 한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꼈고, 그게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날 성장시키는 원천이 될 것이라 여겼다. 데이트 약속 보다는 교사회의나 동아리 모임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런 멋진 사상들이 '한 사람' 앞에 서면 무너지곤 했다. "그래서 나 사랑해? 내가 그 민중이고 가난한 사람이다. 나나 좀 사랑해줘라" 이 한 마디에 난 토대가 약한 가건물처럼 삐그덕거렸다. "그래,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누굴 사랑한다는 거지?" 책속에서 만났던 개별적인 사랑을 무시하거나 말도 꺼내지 않는 철학가, 사상가들이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내 목숨 같은 한사람 / 소중한 사람 / 세상이 날 버려도 / 언제나 날 안아 주고 / 내 편이 되 줄 사람 / 그댈 사랑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다비치의 '한사람'이라는 노래의 가삿말이다. 다비치의 이해리는 내게 아이돌이 가창력이 없다는 선입견을 깨준 가수다. 아이돌은 뭐든 잘한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예능이면 예능. 삼천포로 빠지는 군. 다시 돌아가 질문을 해본다. 세상이 버려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애인일까? 애인도 헤어지면 남이다. 사랑하는 그 순간만큼은 오직 둘 뿐이겠지만 세상이 상대방을 버린다면 헤어짐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부부는 결혼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며 세상에 하나임을 선포한 사이이기 때문에 좀 다르다. 부부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양대 산맥이다. 망망대해를 건너는 한 배를 탄 것이다. 김용규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이상적인) “가정이란 그 사람의 외모, 성격, 재능 또는 재산 등등 때문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 그의 존재 곧 자신의 '있음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라는 것을 뜻한다. 대체로 아이들은 내가 있으면 좋아하고 없으면 슬퍼한다. 잠 잘 때도 같이 자고 싶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어디든 같이 가길 좋아한다. 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고 나의 부재를 슬퍼해준다. 그래서 난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을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르셀(Gabriel-Honore Marcel, 1889~1973)이라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는 "가족을 통해서 나는 최초로 세계 안에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있다는 나의 '공간적 확장'을 깨닫게 되며, 부모들이 나에게 관여하듯이 나도 그들과 나의 아이들에게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나의 '시간적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고 길~게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난 연애시절의 고민이었던 '한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의 괴리'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사랑하는 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나 같은 경우엔 '선물'이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존재 자체를 기뻐해주는 관계를 만끽하라. 그 다음에 그것을 확장하자.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한 번에 한 사람씩'.
<사진/양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