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香仁 이은남
- 조회 수 3056
- 댓글 수 5
- 추천 수 0
나는 겉으로만 봤을 때는 비교적 무난하게 범생이처럼 살아온 듯이 보인다고 한다. 비교대상에 따라 어쩌면 날라리(?)로 보일 수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많은 이들이 전자 쪽이라 하니 본인도 가끔 그렇게 수긍하기로 한다. 까칠한 안경을 끼고 가끔 얄밉게 말을 딱 부러지게 내뱉으니 그렇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만 보면 실은 말할 수 없이 게으름뱅이에다 무식한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알아차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쩌다 순발력이 필요한 순간에만 딱 범생이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 귀신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라고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난 변화의 귀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양쪽 경계에 발 한쪽씩 슬쩍 걸치고선 이거다 하는 순간이면 본능적으로 발달한 눈치가 먼저 튀어나온다. 그리곤 상대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 처신으로 범생이 모드를 꾹 유지해 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스타일인데 오랫동안 잘 버텨왔다고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나이와 더불어 약발이 서서히 떨어져 가는 듯하야 미리 자수하여 광명 찾겠노라 마음먹는 요즘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좋은 것만 하고 살고 싶은 게 누구나의 마음이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홀로서기에서 경제력은 필수일 것이다. 특히 나처럼 혼자 살면서 남에게 조금이라도 폐 끼치기 싫어하는 타입은 이 부분에서 결벽증까지 있다. 때론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품위 있게 죽어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마음 먹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우리 세대엔 수명이 자꾸 연장된다고 하니 계획에 차질이 생겨 조금 성가시럽기도 하다.
나는 선천적으로 강제로 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부류에 속한다. 그래서 공부도 좋아하는 과목만 파는 스타일이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앞에서 표정관리도 서투른 편이다. 그러나 회사라는 곳은 그렇게 내 마음대로만은 할 수 없었으니 20년 넘는 조직 생활 속에서 조금은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회사가 사람의 기본성향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니 본인의 기질이나 재능을 살려 잘 맞는 곳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회사를 다니며 사표를 내던질 만한 상황까지 가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근무하고 있다. 한국인이 없다 보니 특별히 경쟁해야 하는 대상도 없었고 납득할 만한 근무 조건은 쿨하다는 나의 성격과 비교적 잘 맞았던 것 같다. 물론 잔잔하게 치사스러운 일이 없었겠냐 마는 그런 일이야 고용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들이다. 나 역시 몇 년에 한번씩 온다는 그만두고 싶은 욕구를 동료들과 술잔을 건네며 그때 그때마다 넘어갔다. 요즘 들어 다른 세상을 찾고 싶은 의지가 꿈틀거리는데 그것은 회사가 싫어서가 아니라 “고마 됐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하는 심정이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했으면 이제 물러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다.
지난 달부터 경영학의 대가들이 쓴 서적들을 읽으면서 계속 나의 지난 회사생활을 돌이켜 보고 있다. 참 무식하고 용감했던 시절들이 마구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회사에 입사해 얼떨결에 한국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앞뒤 분간 못하고 지금까지 뛰어왔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름대로 실적이 만들어지면서 오늘까지 있지만 경영학 서적을 읽다 보니 이거 가슴 쓸어 내리는 장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연찮게 일이 급작스럽게 시작되면서 처리하고 진행해 나가며 산을 넘고 또 넘었다는 느낌인데 과연 경영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미리 알았다면 감히 엄두도 못 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비록 경영을 공부하지는 않았더라도 책에 쓰여진 부분 부분에서 크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그다지 옆길로만 가지는 않았다는 느낌도 있다.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여자가 지휘를 하니 처음엔 해괴하게 보였는지 점잖게 회의를 하다가도 갑자기 “결혼 하셨어요?” 뭐 이런 질문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 보자면 거칠고 복잡한 남자들만의 세계에 생뚱맞게 웬 여자가? 하는 인식이 있었나 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남녀평등의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회사로 그런 시각은 없었으나 한국 기업에서 볼 때는 상당히 의외였던 것 같다. 가끔은 미인계(?)가 통하지 않았을까 하며 혼자 잠시 착각에 빠져본다.
내가 했던 일은 산업용 공조기계를 한국에 판매하는 일로 시장개척에서 대리점 선정과 그 조율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사실 신규 시장개척이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것인지 알았다면 감히 덤벼들 생각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그저 일이 재미있었고 이건 절대로 된다라는 확신과 열정이 넘쳐흘렀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발로 뛰어다니며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고 일을 진행시켜나갔다. 그리고 늘 말하지만 그 결과물인 훈장을 상사들이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난 덕에 그 일은 나의 업적으로 알려지며 리더 격의 자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판매체제가 도입되자 프로젝트 단위의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액도 컸고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자국의 에너지 산업에 일조한다는 자부심이 없었다면 일의 부담감에 나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 일은 내가 시작한 일로 한국에서의 근무자는 나 혼자였으며 힘들다고 도망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돈과 상관없이 도의상으로도 내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었다. 후계자를 만들 때까지 어떻게든 이끌어가야만 했다. 여린(?)몸으로 어떻게 버텨왔는지 오늘날의 나를 보면 가당치도 않다는 느낌이다.
처음 한국에 기계를 도입하고 몇 년간은 계속 현장을 방문해야 했다. 기계가 들어와 설치 된 상황을 견학하는 일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면 해결사로 나가 기계 앞에서 일본인 기술자들과 전화통화를 하며 현장을 지휘해야 했다. 문과 출신이 엔진이니 컴프레서의 구동원리를 이해하고 지시해야 하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했지만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영하 십 도를 넘는 날씨에도 밖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또 때때로 고객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었고 불평하는 고객을 앞에 두고 끝까지 책임 지겠노라 떨리는 속내를 감추며 당당하게 말하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인가 책임소재를 규명해야 하는 순간에 수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계약서를 흔들며 검사처럼 말하던 순간도 기억한다. 누군가가 말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사람은 한국에선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계는 복잡해서 전문가들만이 만질 수 있었고 나는 몰라도 전문가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용어가 있었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은 나설 수가 없다. 다행히 이 업계에서 나만 이 쪽의 프로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은 회의를 할 때마다 마치 조폭처럼 양복 입은 남자들을 거느리며 참석하게 된다. 덩치도 커다란 여자가 회의장 가운데 떡 하니 앉고 양쪽으로 각 전문가들을 배석시킨다. 영업에 관한 프레젠은 영업 담당이, 제어 관련은 또 그쪽 담당자가, 엔진은 엔진전문가들에게 발표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회의 진행을 하면 되었다. 시작하는 인사와 마무리 인사, 피드백, 그리고 저녁 회식에서 건배를 제창하는 것이 나의 임무인 셈이다.
그래도 가끔 식당 개 삼 년에 라면 끓인다고 요즘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엔지니어 출신이냐고 물어오곤 한다. 기술 연수 통역을 몇 년씩 하다 보니 새로 들어온 사람은 내가 그럴 듯 해 보이는 듯하다. 위대한 나의 혁명이란 책에서 나의 재능 중에 하나가 의사소통이라고 했을 때 옳거니 했다. 어쨌거나 다행스럽게 게으름과 무식함이 들통나지 않고 무사히 시간이 흘러주어 오늘 날까지 오게 되었음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회사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고객 가까이에 있어서 그들을 대변하며 고객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반영해 나갔던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대한 조직을 설득함에 있어 힘을 받는 부분은 늘 고객의 요구, 다시 말해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였다. 현장에서의 보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을 지녔다. 우리 회사의 리더들은 겸허하게 그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 덕택에 한국에서의 사업은 체계가 정립되어 갔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리더십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회사 일을 해 왔다. 어찌 보면 동물적인 본능과 육감에 의지해 순간 순간 대처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런 시절이 거반 다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경영학 책을 접하게 되었다. 다행인가 불행인가, 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이면에는 “알면 못했지..나처럼 소심하고 못하는 거 보여주기 싫어하는 인간이 만약 제대로 된 이론을 배웠더라면 절대 뛰어들지 못 했을 거야” 라며 쓴 웃음을 짓고 있다. 만약 알았다면 한참 뒤에서 돌다리만 두들기다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여간 얼굴이 뜨끈뜨끈하다. 아, 나 정말 참 무식해서 용감했구나..
이렇게 살아온 게 어디 이것 뿐이겠냐만 그저 이 민망함을 감추고저 잽싸게 범생이 모드로 돌아가 살인 미소를 예쁘게 짓고 있는 중이다. (요즘 이것도 잘 안 먹히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IP *.48.38.252
누군가는 내게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라고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난 변화의 귀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양쪽 경계에 발 한쪽씩 슬쩍 걸치고선 이거다 하는 순간이면 본능적으로 발달한 눈치가 먼저 튀어나온다. 그리곤 상대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 처신으로 범생이 모드를 꾹 유지해 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스타일인데 오랫동안 잘 버텨왔다고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나이와 더불어 약발이 서서히 떨어져 가는 듯하야 미리 자수하여 광명 찾겠노라 마음먹는 요즘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좋은 것만 하고 살고 싶은 게 누구나의 마음이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홀로서기에서 경제력은 필수일 것이다. 특히 나처럼 혼자 살면서 남에게 조금이라도 폐 끼치기 싫어하는 타입은 이 부분에서 결벽증까지 있다. 때론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품위 있게 죽어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마음 먹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우리 세대엔 수명이 자꾸 연장된다고 하니 계획에 차질이 생겨 조금 성가시럽기도 하다.
나는 선천적으로 강제로 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부류에 속한다. 그래서 공부도 좋아하는 과목만 파는 스타일이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앞에서 표정관리도 서투른 편이다. 그러나 회사라는 곳은 그렇게 내 마음대로만은 할 수 없었으니 20년 넘는 조직 생활 속에서 조금은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회사가 사람의 기본성향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니 본인의 기질이나 재능을 살려 잘 맞는 곳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회사를 다니며 사표를 내던질 만한 상황까지 가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근무하고 있다. 한국인이 없다 보니 특별히 경쟁해야 하는 대상도 없었고 납득할 만한 근무 조건은 쿨하다는 나의 성격과 비교적 잘 맞았던 것 같다. 물론 잔잔하게 치사스러운 일이 없었겠냐 마는 그런 일이야 고용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들이다. 나 역시 몇 년에 한번씩 온다는 그만두고 싶은 욕구를 동료들과 술잔을 건네며 그때 그때마다 넘어갔다. 요즘 들어 다른 세상을 찾고 싶은 의지가 꿈틀거리는데 그것은 회사가 싫어서가 아니라 “고마 됐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하는 심정이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했으면 이제 물러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다.
지난 달부터 경영학의 대가들이 쓴 서적들을 읽으면서 계속 나의 지난 회사생활을 돌이켜 보고 있다. 참 무식하고 용감했던 시절들이 마구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회사에 입사해 얼떨결에 한국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앞뒤 분간 못하고 지금까지 뛰어왔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름대로 실적이 만들어지면서 오늘까지 있지만 경영학 서적을 읽다 보니 이거 가슴 쓸어 내리는 장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연찮게 일이 급작스럽게 시작되면서 처리하고 진행해 나가며 산을 넘고 또 넘었다는 느낌인데 과연 경영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미리 알았다면 감히 엄두도 못 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비록 경영을 공부하지는 않았더라도 책에 쓰여진 부분 부분에서 크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그다지 옆길로만 가지는 않았다는 느낌도 있다.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여자가 지휘를 하니 처음엔 해괴하게 보였는지 점잖게 회의를 하다가도 갑자기 “결혼 하셨어요?” 뭐 이런 질문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 보자면 거칠고 복잡한 남자들만의 세계에 생뚱맞게 웬 여자가? 하는 인식이 있었나 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남녀평등의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회사로 그런 시각은 없었으나 한국 기업에서 볼 때는 상당히 의외였던 것 같다. 가끔은 미인계(?)가 통하지 않았을까 하며 혼자 잠시 착각에 빠져본다.
내가 했던 일은 산업용 공조기계를 한국에 판매하는 일로 시장개척에서 대리점 선정과 그 조율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사실 신규 시장개척이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것인지 알았다면 감히 덤벼들 생각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그저 일이 재미있었고 이건 절대로 된다라는 확신과 열정이 넘쳐흘렀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발로 뛰어다니며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고 일을 진행시켜나갔다. 그리고 늘 말하지만 그 결과물인 훈장을 상사들이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난 덕에 그 일은 나의 업적으로 알려지며 리더 격의 자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판매체제가 도입되자 프로젝트 단위의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액도 컸고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자국의 에너지 산업에 일조한다는 자부심이 없었다면 일의 부담감에 나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 일은 내가 시작한 일로 한국에서의 근무자는 나 혼자였으며 힘들다고 도망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돈과 상관없이 도의상으로도 내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었다. 후계자를 만들 때까지 어떻게든 이끌어가야만 했다. 여린(?)몸으로 어떻게 버텨왔는지 오늘날의 나를 보면 가당치도 않다는 느낌이다.
처음 한국에 기계를 도입하고 몇 년간은 계속 현장을 방문해야 했다. 기계가 들어와 설치 된 상황을 견학하는 일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면 해결사로 나가 기계 앞에서 일본인 기술자들과 전화통화를 하며 현장을 지휘해야 했다. 문과 출신이 엔진이니 컴프레서의 구동원리를 이해하고 지시해야 하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했지만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영하 십 도를 넘는 날씨에도 밖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또 때때로 고객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었고 불평하는 고객을 앞에 두고 끝까지 책임 지겠노라 떨리는 속내를 감추며 당당하게 말하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인가 책임소재를 규명해야 하는 순간에 수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계약서를 흔들며 검사처럼 말하던 순간도 기억한다. 누군가가 말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사람은 한국에선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계는 복잡해서 전문가들만이 만질 수 있었고 나는 몰라도 전문가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용어가 있었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은 나설 수가 없다. 다행히 이 업계에서 나만 이 쪽의 프로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은 회의를 할 때마다 마치 조폭처럼 양복 입은 남자들을 거느리며 참석하게 된다. 덩치도 커다란 여자가 회의장 가운데 떡 하니 앉고 양쪽으로 각 전문가들을 배석시킨다. 영업에 관한 프레젠은 영업 담당이, 제어 관련은 또 그쪽 담당자가, 엔진은 엔진전문가들에게 발표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회의 진행을 하면 되었다. 시작하는 인사와 마무리 인사, 피드백, 그리고 저녁 회식에서 건배를 제창하는 것이 나의 임무인 셈이다.
그래도 가끔 식당 개 삼 년에 라면 끓인다고 요즘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엔지니어 출신이냐고 물어오곤 한다. 기술 연수 통역을 몇 년씩 하다 보니 새로 들어온 사람은 내가 그럴 듯 해 보이는 듯하다. 위대한 나의 혁명이란 책에서 나의 재능 중에 하나가 의사소통이라고 했을 때 옳거니 했다. 어쨌거나 다행스럽게 게으름과 무식함이 들통나지 않고 무사히 시간이 흘러주어 오늘 날까지 오게 되었음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회사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고객 가까이에 있어서 그들을 대변하며 고객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반영해 나갔던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대한 조직을 설득함에 있어 힘을 받는 부분은 늘 고객의 요구, 다시 말해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였다. 현장에서의 보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을 지녔다. 우리 회사의 리더들은 겸허하게 그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 덕택에 한국에서의 사업은 체계가 정립되어 갔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리더십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회사 일을 해 왔다. 어찌 보면 동물적인 본능과 육감에 의지해 순간 순간 대처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런 시절이 거반 다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경영학 책을 접하게 되었다. 다행인가 불행인가, 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이면에는 “알면 못했지..나처럼 소심하고 못하는 거 보여주기 싫어하는 인간이 만약 제대로 된 이론을 배웠더라면 절대 뛰어들지 못 했을 거야” 라며 쓴 웃음을 짓고 있다. 만약 알았다면 한참 뒤에서 돌다리만 두들기다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여간 얼굴이 뜨끈뜨끈하다. 아, 나 정말 참 무식해서 용감했구나..
이렇게 살아온 게 어디 이것 뿐이겠냐만 그저 이 민망함을 감추고저 잽싸게 범생이 모드로 돌아가 살인 미소를 예쁘게 짓고 있는 중이다. (요즘 이것도 잘 안 먹히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댓글
5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