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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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 대표로 합창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KBS라디오 방송국에 가서 성우들과 함께 라디오방송프로그램을 하였던 것이다.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아무것도 없이 길다란 마이크만 사람 키만 하게 삐죽삐죽 올라와 있었고, 떠들면 안 돼어서 조용조용 암실 같은 방음 시설이 된 곳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노래하였으며, 나중에 성우인지 아나운서인지 방송인의 질문에 몇 가지 대답하고 나온 기억이 난다. 키가 커서 그랬든가 여러 친구들 가운데 내게로 마이크가 와서 우연찮게 내 목소리를 가지고 방송을 다 타보기도 한 경험이다. 그런데 그게 몇 날 몇 시에 방송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는 챙겨 들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의 합창이 어떻게 나왔는지 내 목소리는 어땠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그때에 우리 집에는 녹음기도 없었고, 우리가 학교에서 수업 받는 시간에 방송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에 우리 집에 녹음기가 있었거나 했더라면 아마도 나를 잘 보호해 주곤 하던 큰 오빠가 내 대신 녹음을 해주었을 텐데 말이다. 아니면 군대 가고 집에 없을 때였나? 그것도 아니라면 직장에 나갈 때였을까?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때에 내 목소리와 내가 무슨 말을 했을지 말이다. 나이를 들어가나? 갑자기 어린 시절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시에 나는 방송국에 갔다가 무지 실망했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미 텔레비전이 나온 시절이었는데 라디오 방송국엘 간다는 것은 무언가 좀 시대에 뒤쳐진 느낌이 나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을 마치 요즘의 집이나 자동차 장만이나 하듯이 큰마음을 먹고 별러서 사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가치는 참으로 놀라우리만치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TV가 나오자마자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했겠지만 라디오는 고물이나 바꿔먹거나 잠자기 전에 혹은 TV가 방영되기 전에나 필요한 것이지, 그 가치는 TV에 비하면 한참이나 함량 미달인 것처럼 괄시를 받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껏 합창을 연습하고 단체복처럼 옷도 다 똑같이 준비해 입고 나갔는데 옷이나 얼굴 모양은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만 나오는 곳엘 갔으니 나는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하도 방송국엘 나간다고 하니 나는 당연 <누가 누가 잘 하나>의 TV 방영 프로그램처럼 사람 얼굴과 우리들의 모습이 다 비춰지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목소리만 나오는 라디오방송프로그램에 나간 것이었으니 실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 내가 가졌던 의문점이 하나가 생각난다. 우리는 그때 선생님의 지시로 하얀 블라우스에 파란색 스커트를 모두 갖춰 입고 똑같은 복장을 하고 방송에 출연을 하였다. 그때도 생각한 것이지만 TV화면에 나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들 그리 통일감을 주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모조리 같은 제복 같은 단체복을 입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또 제 각각 그것을 준비하느라고 나름 얼마나 힘이 들었던가. 뭐도 쓸려면 없다고 구색을 갖추는 것이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두들 한껏 뽐내며 참여한 방송이었는데, 가서보니 어두컴컴한 곳에 마이크만 있고 성우들 몇이 서서 종이를 들고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방음장치가 된 그곳에 성우들이 서있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 불빛이 들어오고 다른 곳은 캄캄할 정도였던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하고선 방송을 마치고 나왔다. 그때 그분이 고은정 아나운서였던가? 하여간 당시에는 성우 중에 상종가를 날리던 분이었다. 그분이 남자 성우와 여자 성우 두어 명과 함께 대본을 읽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의 기분은 별로였다. 방송을 마치고도 별로 신나는 기억이 없었지 싶다. 한마디로 허전함이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직전 예비대학생으로서 안국동 걸스카우트 회관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서 시간도 많고 별로 할 일도 없고 또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기회도 아니고 해서 나는 선배의 소개로 <우리는 하나!>라는 프로그램엘 참가했었다. 그때에도 라디오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었다. 한때 코미디나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날리던 강석과 배추머리 김병조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흔히 선거철이 되면 연예인들이 갑자기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어느 날 정치를 하겠다고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대중 집회에 참가하여 대권 후보자 가운데 누군가를 지지하기도 하는 데, 당시에 김병조씨도 어느 유세장에 참여하여 코미디언으로서 분위기를 띄우며 통민당(통일민주당)은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 당 총재가 정권을 잡음으로 인해 갑자기 매스컴에서 사라지기도 하였었다. 최근 강석씨는 자신이 방송인과 연예인들의 학력위조에 연루된 한사람임을 시인한 바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개인의 순수성에 가치의 기반을 두고 있는 그대로의 재능을 평가하기보다 매스컴 등에 의존도를 필요 이상 높이하며,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조장하여 부풀리고 자극적으로 거대하게 보여줄 수 있는 포장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의 위치가 중요했던 감이 없지 않아왔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제의 어설픈 과오들을 답습하지 말고 반성하는 가운데 벗어던져야 할 삶의 방식들은 아닐까 기억을 더듬은 김에 생각해 본다. 하여튼 1980년대 중반 경부터 매스컴을 주름잡으며 명콤비로 주가를 날렸던 그들 둘이 81년 우리들이 참가한 행사에 취재를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곳에 모여 난생처음 받아보는 인성심리 테스트인가 뭔가 하는 것도 했고 그 외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경험하였다. 포크댄스 같은 것도 몇 가지 배우면서. 그런데 그때에도 그 두 명의 MC가 나와 몇몇 친구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어떤 아이는 사회자가 마이크를 가져다 대자 벌벌 떨며 땀을 비 오듯 하게 흘리기도 하고 어물어물 버벅대느라 말은 하지도 못하고 뜸만 들이다가 시간을 다 잡아 먹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어쩌고저쩌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잘했다. 방송이 될 거라는 기대감도 없이. 그리고는 이번에야 말로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진짜로 잘 들어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가 녹음을 했었다. 그런데 정말 우습고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아이들 것은 다 잘리고 내 목소리만 한참 동안 방송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정말 세상에 두려움이란 것이 내 사전에 없었다. 세상이 만만한 것과는 달리 일상이 그저 편안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당시 각 학교 대표급으로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참여를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공부를 썩 잘하지 않았어도 아니 좀 못했어도 별로 기죽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밝고 명랑함 때문에 평상시처럼 자연스레 말한 것이 부담감 없이 방송에 그대로 다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나는 수업시간에도 어떨 때는 말을 잘 못한다. 꿈 찾기 프로그램에 가서도 우느라고 말을 잊지 못했고 수업에서도 설명을 하다가도 목이 매여서 여러 번 멈추었으며 그냥 벗들과 이야기 하다가도 전화 통화 도중에도 곧잘 울먹이고 말을 잘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이혼이라는 경험을 하면서 아니 그와 결혼해서 살면서 갖게 된 현상이었다. 나는 시댁에 첫 인사를 드리러 간 그날부터 심하게 눈물이 나왔다. 왜 울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인사를 다 드리고 별로 편하지 않은 마음에서 그와 시화호에 드라이브를 나갔는데 라디오에서 무슨 음악인가가 흘러나왔고 그 음악을 듣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왔다는 안도감이 들자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나도 모르는 긴장감 같은 것이 나를 엄습했던 것일까?
사는 동안 그는 그날 왜 그렇게 울었느냐고 내게 여러 번 물어왔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단지 무언가 엄습하는 불안감이랄까 편하지 않음이 문제라면 문제였고 장차 남편이 될 그 사람도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다. 싫어하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앞에서는 나를 마음껏 펼쳐 놓을 수가 없었다. 결혼생활 중에도 내내 늘 불안하고 억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눈물은 내 삶과 함께 했다. 내게 펼쳐진 생활과 함께 늘 나를 강타했다. 나는 아직도 너무나 눈물이 난다. 중년을 눈물과 함께 보내라는 것이 내 운명이었거나 아니면 내가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일을 저지른 팔자의 장본인인 것이다. 결혼 그리고 이혼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
지금의 나는 누구와 편히 말을 하기 전이나 기쁜 일에도 눈물이 먼저 날 때가 많다. 나를 표현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내 유년의 밝고 명랑함은 다 어디로 사라져갔는가? 청년시절 평화로운 마음의 여유는 다 어디로 달아나버리고 말았을까?
.......
그러나 그러다가 금세 웃어버리기도 한다. 하하하.
토요일엔 미팅이 있다. 내가 쓸 책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잘 헤매는데 넋을 놓고 살아오는 동안 더욱 멍해 진 것 같다. 그래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한다. 요즘엔 특히 목소리가 많이 변했다. 오랜 우울은 목소리를 변색시킨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 말을 다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또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명확히 알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사람이 이럴 때도 있고 저러할 때도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어차피 글은 써야하고 다 쓴 것도 아니니 전에 없는 좋은 기회로 삼으면서 인생의 과정으로 충실해나 볼 일이지 않겠는가. 울게 되면 울고 웃게 되면 웃으면서. 울다가 웃으면?
IP *.70.72.121
그때에 우리 집에는 녹음기도 없었고, 우리가 학교에서 수업 받는 시간에 방송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에 우리 집에 녹음기가 있었거나 했더라면 아마도 나를 잘 보호해 주곤 하던 큰 오빠가 내 대신 녹음을 해주었을 텐데 말이다. 아니면 군대 가고 집에 없을 때였나? 그것도 아니라면 직장에 나갈 때였을까?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때에 내 목소리와 내가 무슨 말을 했을지 말이다. 나이를 들어가나? 갑자기 어린 시절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시에 나는 방송국에 갔다가 무지 실망했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미 텔레비전이 나온 시절이었는데 라디오 방송국엘 간다는 것은 무언가 좀 시대에 뒤쳐진 느낌이 나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을 마치 요즘의 집이나 자동차 장만이나 하듯이 큰마음을 먹고 별러서 사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가치는 참으로 놀라우리만치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TV가 나오자마자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했겠지만 라디오는 고물이나 바꿔먹거나 잠자기 전에 혹은 TV가 방영되기 전에나 필요한 것이지, 그 가치는 TV에 비하면 한참이나 함량 미달인 것처럼 괄시를 받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껏 합창을 연습하고 단체복처럼 옷도 다 똑같이 준비해 입고 나갔는데 옷이나 얼굴 모양은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만 나오는 곳엘 갔으니 나는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하도 방송국엘 나간다고 하니 나는 당연 <누가 누가 잘 하나>의 TV 방영 프로그램처럼 사람 얼굴과 우리들의 모습이 다 비춰지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목소리만 나오는 라디오방송프로그램에 나간 것이었으니 실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 내가 가졌던 의문점이 하나가 생각난다. 우리는 그때 선생님의 지시로 하얀 블라우스에 파란색 스커트를 모두 갖춰 입고 똑같은 복장을 하고 방송에 출연을 하였다. 그때도 생각한 것이지만 TV화면에 나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들 그리 통일감을 주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모조리 같은 제복 같은 단체복을 입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또 제 각각 그것을 준비하느라고 나름 얼마나 힘이 들었던가. 뭐도 쓸려면 없다고 구색을 갖추는 것이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두들 한껏 뽐내며 참여한 방송이었는데, 가서보니 어두컴컴한 곳에 마이크만 있고 성우들 몇이 서서 종이를 들고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방음장치가 된 그곳에 성우들이 서있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 불빛이 들어오고 다른 곳은 캄캄할 정도였던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하고선 방송을 마치고 나왔다. 그때 그분이 고은정 아나운서였던가? 하여간 당시에는 성우 중에 상종가를 날리던 분이었다. 그분이 남자 성우와 여자 성우 두어 명과 함께 대본을 읽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의 기분은 별로였다. 방송을 마치고도 별로 신나는 기억이 없었지 싶다. 한마디로 허전함이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직전 예비대학생으로서 안국동 걸스카우트 회관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서 시간도 많고 별로 할 일도 없고 또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기회도 아니고 해서 나는 선배의 소개로 <우리는 하나!>라는 프로그램엘 참가했었다. 그때에도 라디오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었다. 한때 코미디나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날리던 강석과 배추머리 김병조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흔히 선거철이 되면 연예인들이 갑자기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어느 날 정치를 하겠다고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대중 집회에 참가하여 대권 후보자 가운데 누군가를 지지하기도 하는 데, 당시에 김병조씨도 어느 유세장에 참여하여 코미디언으로서 분위기를 띄우며 통민당(통일민주당)은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 당 총재가 정권을 잡음으로 인해 갑자기 매스컴에서 사라지기도 하였었다. 최근 강석씨는 자신이 방송인과 연예인들의 학력위조에 연루된 한사람임을 시인한 바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개인의 순수성에 가치의 기반을 두고 있는 그대로의 재능을 평가하기보다 매스컴 등에 의존도를 필요 이상 높이하며,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조장하여 부풀리고 자극적으로 거대하게 보여줄 수 있는 포장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의 위치가 중요했던 감이 없지 않아왔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제의 어설픈 과오들을 답습하지 말고 반성하는 가운데 벗어던져야 할 삶의 방식들은 아닐까 기억을 더듬은 김에 생각해 본다. 하여튼 1980년대 중반 경부터 매스컴을 주름잡으며 명콤비로 주가를 날렸던 그들 둘이 81년 우리들이 참가한 행사에 취재를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곳에 모여 난생처음 받아보는 인성심리 테스트인가 뭔가 하는 것도 했고 그 외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경험하였다. 포크댄스 같은 것도 몇 가지 배우면서. 그런데 그때에도 그 두 명의 MC가 나와 몇몇 친구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어떤 아이는 사회자가 마이크를 가져다 대자 벌벌 떨며 땀을 비 오듯 하게 흘리기도 하고 어물어물 버벅대느라 말은 하지도 못하고 뜸만 들이다가 시간을 다 잡아 먹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어쩌고저쩌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잘했다. 방송이 될 거라는 기대감도 없이. 그리고는 이번에야 말로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진짜로 잘 들어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가 녹음을 했었다. 그런데 정말 우습고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아이들 것은 다 잘리고 내 목소리만 한참 동안 방송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정말 세상에 두려움이란 것이 내 사전에 없었다. 세상이 만만한 것과는 달리 일상이 그저 편안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당시 각 학교 대표급으로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참여를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공부를 썩 잘하지 않았어도 아니 좀 못했어도 별로 기죽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밝고 명랑함 때문에 평상시처럼 자연스레 말한 것이 부담감 없이 방송에 그대로 다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나는 수업시간에도 어떨 때는 말을 잘 못한다. 꿈 찾기 프로그램에 가서도 우느라고 말을 잊지 못했고 수업에서도 설명을 하다가도 목이 매여서 여러 번 멈추었으며 그냥 벗들과 이야기 하다가도 전화 통화 도중에도 곧잘 울먹이고 말을 잘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이혼이라는 경험을 하면서 아니 그와 결혼해서 살면서 갖게 된 현상이었다. 나는 시댁에 첫 인사를 드리러 간 그날부터 심하게 눈물이 나왔다. 왜 울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인사를 다 드리고 별로 편하지 않은 마음에서 그와 시화호에 드라이브를 나갔는데 라디오에서 무슨 음악인가가 흘러나왔고 그 음악을 듣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왔다는 안도감이 들자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나도 모르는 긴장감 같은 것이 나를 엄습했던 것일까?
사는 동안 그는 그날 왜 그렇게 울었느냐고 내게 여러 번 물어왔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단지 무언가 엄습하는 불안감이랄까 편하지 않음이 문제라면 문제였고 장차 남편이 될 그 사람도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다. 싫어하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앞에서는 나를 마음껏 펼쳐 놓을 수가 없었다. 결혼생활 중에도 내내 늘 불안하고 억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눈물은 내 삶과 함께 했다. 내게 펼쳐진 생활과 함께 늘 나를 강타했다. 나는 아직도 너무나 눈물이 난다. 중년을 눈물과 함께 보내라는 것이 내 운명이었거나 아니면 내가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일을 저지른 팔자의 장본인인 것이다. 결혼 그리고 이혼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
지금의 나는 누구와 편히 말을 하기 전이나 기쁜 일에도 눈물이 먼저 날 때가 많다. 나를 표현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내 유년의 밝고 명랑함은 다 어디로 사라져갔는가? 청년시절 평화로운 마음의 여유는 다 어디로 달아나버리고 말았을까?
.......
그러나 그러다가 금세 웃어버리기도 한다. 하하하.
토요일엔 미팅이 있다. 내가 쓸 책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잘 헤매는데 넋을 놓고 살아오는 동안 더욱 멍해 진 것 같다. 그래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한다. 요즘엔 특히 목소리가 많이 변했다. 오랜 우울은 목소리를 변색시킨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 말을 다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또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명확히 알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사람이 이럴 때도 있고 저러할 때도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어차피 글은 써야하고 다 쓴 것도 아니니 전에 없는 좋은 기회로 삼으면서 인생의 과정으로 충실해나 볼 일이지 않겠는가. 울게 되면 울고 웃게 되면 웃으면서. 울다가 웃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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