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란볼루2
풍광으로부터 위로받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호텔을 나섰다. 가게 주인들은 자기 집 앞의 눈만 조금 치웠을 뿐이다. 눈사태가 나도록 내린 눈을 어떻게 다 치울 수 있겠는가? 행인들은 조심조심해서 걷는다. 나 또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었다. 샤프란볼루로 가는 돌무시가 있으려나 하고 조바심을 쳤는데 다행히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나무들은 눈꽃을 그대로 달고 있다. 돌무시는 느리게 달리고 있다. 차창 밖엔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사람들도 뜻하지 않은 눈폭탄에 좋아하면서도 일상의 질서가 깨어져 버린 것에 불평을 터뜨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일상에 틈입자가 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참지 못한다. 추위 탓도 잇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추위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 청년을 발견했다. 그에게서는 자신이 정한 질서를 주변의 환경과는 무관하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켜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카뮈는 “한 인간이 자기 삶의 내용을 이루던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로 절망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꼭 절망으로 인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명징한 정신이 어느 도에 이르면 사람은 자기 가슴이 곽 막히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리하여 반항도 요구도 없이 지금까지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등을 돌려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햇다. 뭔가 이루려고 뭔가 가지려고 그렇게 애쓰고 몸부림친 것은 잊어버린 듯 포기하거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그 이유란 명확하지도 않다. 그저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프란볼루는 셀주크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역의 요충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스만 투르크시대인 17세기 경에는 한층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케르반사라이가 건설되고 도시는 번영했다. 많은 부를 축적한 도시의 사람들은 앞 다투어 아름답고 큰 집을 지었다.
샤프란볼루에 내리니 첫 느낌이 중세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샤프란블루는 어떤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중세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프란볼루의 집들은 자연물로 지워진 목조건물이기 때문에 외관이 아름답고 벌써 고색창연한 맛이 난다. 돌무시 정류장 앞엔 지붕을 우리로 만든 커다란 진지하맘(목욕탕)이 있고, 1600년대에 지어진 케르반사라이가 있다. 높고도 긴 돌담이 둘러쳐진 케르반사라이는 지금은 호텔로 쓰이고 있다.
돌무시에서 내리니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어디든 들어가고 싶었다. 환하게 불 밝힌 로쿰가게들이 아늑하고 너무나 따뜻해 보였다. 로쿰은 터키인들의 군것질거리로 매우 달다. 가게에서 구경도 하면서 달콤한 로쿰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넓지 않은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겨울이라 아무래도 관광객들이 드물었다. 내가 들어선 길은 공방이 몰려있는 곳이다. 한참을 올라가자 가죽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가 차이를 한 잔 하고 가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물려준 한국전쟁에 관한 스크랩북을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이곳엔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것 같앗다. 연민과 고마움이 교차되었다. 할아버지가 내미는 뜨거운 차이를 마셨다. 한쪽에 얌전히 앉아 할아버지가 가죽팔찌며 가죽지갑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전지갑으로 쓸 수 있는 것을 하나 사서 가게를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흐드를륵언덕으로 갔다.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눈앞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 <행복의 충격>, 그러다. 지금 내가 광활하고 아름다운 풍광에 행복의 충격을 받은 것이다.
“정신은 많은 것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측정하는 일뿐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것이라 했다.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거칠 것없이 너른 평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대(大)장관 앞에서 눈을 감고 스스로를 그 속에 몰입시켜 자연 자체가 되고 그 영향을 얻고 싶어질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후일 그 대(大)장관 없이도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大)장관은 우리들 자신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그렇다. 우리는 대 자연 앞에서 위로를 받고 그들이 보여주는 풍광만으로도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중세의 마을을 걷다보면 복잡한 머릿속은 하얗게 빛 바래고 사프란 볼루의 향기로 가득 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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